룻기 강해

룻기강해 4.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3)

호주 신부 2024. 2. 4. 19:05

20180225

룻기 1 1~5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지금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평창 올림픽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Me too 운동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까? 약자들의 살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세상이야말로 메마른 세상, 생명의 기운이 시든 세상, 곧 심판을 앞둔 세상입니다. 타락한 세상, 음란한 세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에 만연한 성추행을 폭로 한 일을 계기로 감춰져 왔던 성폭력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특히 권력을 가진  상사들에 의해 관행적으로 저질러졌던 성폭력이 무너진 저수지의 둑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문단, 연극 영화계를 거쳐서 드디어 종교계에도 ‘Me too’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경이 되자 보수 기득권 세력들과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나라가 온 통 과거의 일을 들추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들을 내기 시작합니다. 안 좋은 것들을 자꾸만 들춰내서 국격이 실추된다고 하고, 교회의 위상이 내려가서 복음전파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강자들이 저질러온 잘못들을 깨끗이 빨아주는 자동세탁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땅에서 저지른 죄를 간편하게 교회로 가져가 말끔하게 해결하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 Me too 운동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실추된다면, 내려간 김에 더 내려가야 합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야 새롭게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시간 계산법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입니다. 해가 뜨는 것을 기준으로 하루를 세던 방식과는 정 반대의 방식으로 하루를 셉니다. 해가 지는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려감이 먼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칙칙하고 암울한 룻기의 서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사시대를 견디기도 힘이 든데, 거기다가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빵집이란 뜻을 가진 풍요를 상징하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암울함의 극치는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름으로 왕이 없는 시대인 사사시대에 맞서서 살아보려고 했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육신의 양식을 찾아서 언약의 땅을 떠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멜렉이 선택한 땅은 모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모압은 절대로 내려가면 안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흉년을 이겨보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과는 정 반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위대한 선언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이 없는 땅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들어올 수도 없는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보려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안좋은 일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 머피의 법칙처럼, 엘리멜렉의 가정에는 비극이 줄지어 찾아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엘리멜렉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두 아들마저 차례로 죽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일이 안풀려도 이렇게 불행이 한꺼번에 줄지어 덮치는 경우는 찾아보기도 힘들 것입니다.

 

이제 룻기의 무대는 침묵만이 흐릅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 셋이 모여 사는 암울한 장면입니다. 남편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 이민와서 남편과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과부 나오미의 신세도 처절하고, 이민자 가정의 남자인 말론과 기룐에게 시집왔는데 느닷없이 과부가 되어버린, 그래서 역시 과부로 남겨진 시어머니와 살아가야 하는 룻과 나오미의 신세는 헛웃음만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모압에서의 이 암울한 삶은 무려 1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10년이란 세월에 유난히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저희 가정이 호주 땅을 밟은 지가 올해로 10년 째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중에 오후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는데, 마침 캐나다의 산골에서 목회를 하는 아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친동생은 아니지만 친형제처럼 지내는 목사입니다. 2006년에 유학을 떠나서 갖은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교수자리를 약속했던 학교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캐나다 산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 목사가 전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우리 못 본지가 10년도 넘어 부렀네.”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정말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친구는 유난히 어릴적 우리 아이들을 예뻐했기 때문에 10년이란 세월의 변화를 아이들에게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많이 컸는가?”

 

순간 코끝이 찡했습니다.

우리는 전화상으로 단지 아이들의 안부를 주고 받았을 뿐이지만, 우리가 나눈 이야기 속의 10년이란 세월이 주는 무게감을 누구보다도 한 사람은 캐나다에서 한 사람은 호주 땅에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저의 둘째 아이가 대학교에 다니는 세월입니다. 10년이란 세월동안 캐나다에 있는 동생 목사는 목수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고, 저는 청소를 하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이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을 때, 그 어감이 단지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가를 묻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울컥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저보다 오래되었거나 비슷한 세월을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10년은 어땠습니까? 오르막의 연속 이었습니까, 내리막의 연속이었습니까? 아니면 수도 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으로 오르내리셨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항상 밝은 얼굴을 보여주시는 분은 장로님과 김 권사님 이십니다. 이 두 분을 뵈면 절대로 절망이나 우울 같은 단어들은 연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저 두 분은 인생을 참 순탄하게 살아오셨구나라고 생각해 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걸어오신 몇 번의 10년은 아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의 첫번째 책 창세기는 요셉의 이야기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보이는 요셉의 모습은 화려합니다. 그가 얼마나 성공한 사람이었는가는 창세기의 마지막 장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 26

 

요셉이 백열 살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은 그의 시신에 방부제 향 재료를 넣은 다음에, 이집트에서 그를 입관하였다.”

 

요셉이 백 열살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미이라로 만들어서 관에 넣었다는 말인데, 미이라를 만들어서 관에 넣었다는 것은 그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절입니다. 요셉은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공신화를 일구어 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셉의 이야기는 성경이 의도하는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어 버렸습니다. “꿈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예전에 많은 청소년 집회와 코스타 강사들의 단골 메뉴가 요셉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처럼 꿈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을 비젼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말합니다. 멋있게 보이지요. , 그 분들의 말에 의하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꿈, 비젼을 두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 꿈을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을 이루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요셉은 20년이 넘는 세월을 내려감 정도가 아니라 땅 밑으로 곤두박질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어릴적 꾸었던 두 번의 꿈은 그냥 꿈에 불과 합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노예로 팔려갔다가 강간 미수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그야말로 꼬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와중에 단 한번도 자신이 어릴적에 꾸었던 꿈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극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나고 파라오의 신임을 받아서 총리가 되고, 흉년이 들어서 자신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왔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을 때, 비로소 예전의 꿈을 기억했노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지만, 추락하는 23년 동안 요셉의 인생에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창세기 39장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39:2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 39:21

 

2절에서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하셨다는데, 도대체 어떤 상황인데 앞길이 잘 열렸다는 것일까요? 바로 어느 권력자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상황입니다. 이게 인생이 잘 풀린 경우입니까? 21절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돌보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 상황입니까? 감옥입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구절들이 주는 울림이 참으로 큽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내려감의 연속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주인집 마님이 자신을 유혹할 때도, “이것은 주님께 죄가 되는 일입니다라고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10년이 무심히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이민 올 때는 남편이 있었고, 두 아들이 있었고, 그리고 아들들이 장가가서 며느리까지 도합 여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부 셋만 청승맞게 살아온지 10년이 흘러버렸습니다. 10년 동안 하나님은 철저하게 보이지 않았고,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룻기는 오늘 이 시대, 특히나 끝없이 내려감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이민자들에게 바람직한 신앙은 무엇이며 성도들이 진정으로 갈망해야 할 믿음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은 기적이나 즉흥적인 기도응답을 동반한 능력있는 믿음이 아니라, 지속되는 삶의 좌절과 하나님의 오랜 침묵을 경험하면서도 그 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