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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2.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1)룻기 강해 2024. 2. 4. 19:03
한국에서 열린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는 피겨여왕 김연아가 성화에 마지막으로 불을 붙이는 장면이었습니다.
8년 전 이맘 때, 교회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때 대부분의 청년들이 일말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습니다. “김연아”. 그렇습니다. 당시에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보자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표를 몰아주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죽을 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반드시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정치를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이명박을 찍어야 된다고 전국 대부분의 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들은 힘있게 강조했으며, 심지어 특별기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장로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성공 이야기 뒤에는 반드시 ‘신화’라는 말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던 장로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김연아’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국민들에 의해 끌려 내려와 감옥에 가 있고, 장로 대통령도 곧 감옥에 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수하게 국민의 힘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지금 한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원인이 문재인 대통령입니까, 아니면 2년 전에 들었던 촛불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인을 믿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제도의 구조 자체가 그렇습니다. 정치인의 첫 번째 관심사는 국민이 아닙니다. 말은 모두가 그렇게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권력입니다. 백퍼센트 그렇습니다. 정치인들이 나쁜 놈들이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제도화 된 국가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살기 좋았던 시대는 언제였을까요?
동양에서는 중국의 요순시대라고 합니다. 사실, 요순시대는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신화나 전설 속의 시대입니다. 하루는 요임금이 재위 50년을 맞아서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점검하기 위해서 평민복을 입고 암행에 나섰습니다. 어느 농촌을 지나는데 늙은 농부 한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는데, 술을 한 잔 걸치고는 자신의 배를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물었습니다.
“농사가 잘 됩니까?”
“하늘이 때를 맞춰 비를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불어 자연히 땅에 곡물이 많이 나게 되었소. 그저 보통 사람인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만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먹을 것도 많이 나오. 그래서 격양가를 부르게 된다오.”
“그러면 이 고을의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습니까?”
“먹을 것이 이렇게 넉넉하고, 생활하는 데 큰 각박함이 없는데 서로 다투고 시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나라의 임금과 다스리는 이들은 정치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 때, 노인이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내 먹을 것 내가 먹고, 내 할 일 내가 하고, 나 잘 때 편히 자고 그랬으면 그만이지, 위에 임금은 있어 무얼 하겠소? 나는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오.”
물론 이것은 동양의 이상적인 정치의 한 형태를 얘기한 것입니다.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인간 왕의 강제나 통제 없이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태평성대를 이루며 잘 살아가는 것만큼 좋은 정치형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룻기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룻기의 저작 목적을 룻기의 주제인 “은혜”에 비추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룻기의 시간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룻기는 이민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이 이민을 갑니다.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타향살이를 선택했지만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빈털털이로 여자 둘만 과부가 되어 역이민자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 온 고향에서 대박을 맞는다는 이야기 입니다.
‘대박’이라는 천박한 표현을 썼는데, 이것이 룻기의 주제인 “은혜”입니다.
룻기가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인정 받는 이유는 이야기의 전개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룻기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사사시대에 일어 났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였을까요? 룻기의 바로 앞에 ‘사사기’라는 책이 들어 있습니다. 사사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합니다. 사사(士師)는 한자입니다. 영어 성경들은 ‘Judge’ 라고 번역했습니다. 재판관이란 뜻이지요. 사사는 재판하는 사법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할까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탈출했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한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 통치기구를 만들고 법을 제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훈련하는 기간이 40년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우고 지켜나가야 할 나라의 형태는 왕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갖고 휘두르는 전제군주 체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국가였습니다.
그 제도를 훈련하는 과정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와있고, 드디어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여호수아입니다. 지금까지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지닌 두 명의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에 의해서 다스려 졌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도 죽었습니다. 그 이후 약 3백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사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열 두 지파(부족)로 나뉘어져서 각자의 땅에서 생활했습니다. 만약 지파 간에 분쟁이 생기거나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갈등을 해결해 주고, 군사를 모아서 전쟁을 지휘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사사”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는 Ruler나 Governor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사가 다스리는 체제는 참으로 이상적인 정치형태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소를 중심으로 각 지파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혈연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민족으로 뭉칩니다. 절대 권력자도 없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이 해결해 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사시대는 철저하게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였습니다. 어쩌면 중국의 전설적인 요순시대에 못지 않은 이상적인 시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저자는 사사시대를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사사기 21장 25절 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개역개정)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새번역)
이것이 사사시대 3백년의 결론입니다.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고 살았다’.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어떤 뉘앙스를 줍니까? 살기가 좋아서 태평성대였다는 느낌입니까, 아니면 무법천지였다는 느낌입니까? 그렇습니다. 후자입니다.
사사기를 읽어보면,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여호수아라는 지도자가 죽고, 혹독한 광야 생활을 겪은 세대들이 모두 죽자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변 나라들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공동의 윤리체계가 무너집니다.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고 상식이 무너졌습니다. 성소에서 봉사하면서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 제사장들이 떠돌아다니며 부잣집의 신당을 돌보는 자리로 취업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사장이 첩을 두는 일이 생겼고, 제사장의 여자가 불량배들에게 성폭행 당하고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무법천지였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추악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 사사기입니다. 사사시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기억하기 싫은 역사가 바로 사사시대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결론은 암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시대가 그렇게 악하게 된 원인을 왕이 없는, 즉 절대 권력자가 없기 때문이었노라고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남깁니다. 물론 이 발언은 그래서 나중에 들어서는 다윗왕정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역사적인 의도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습니까? 왕은 있었습니다. 신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그들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또는 때에 따라 제사장이나 사사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그 시대는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왕을 버린 시대였습니다.
룻기는 바로 그런 왕이 없는, 아니 하나님이 없는 암흑 같은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본회퍼 목사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성도 여러분, 연꽃은 어디에서 피어 납니까? 봄이면 밥상에 올라오는 향긋한 미나리는 어디에서 자라납니까? 흙탕물에서 자라납니다. 온갖 오물들이 섞여 있고, 여름이면 모기들이 득실대는 그런 물에서 연꽃은 피어납니다.
룻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왕이 다스리는 장 정비된 정치체제 아래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었던 캄캄한 사사시대에 빛을 발합니다. 세상이 온통 무법천지여서 제정신을 갖고 살아가기도 힘든 때,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흉년마저 들어서 살아갈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바로 그 시대에 ‘은혜’는 빛을 발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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