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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3.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2)룻기 강해 2024. 2. 4. 19:04
20180218
룻기 1장 1~2절
설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호주에서 10년 째 살다보니, 이런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어색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평창 동계 올림픽과 명절로 분주하고, 호주에서는 막바지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는 한 주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셨습니까?
지난 주 수요일, 쇼핑센터에 갔다가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에 꽃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으나 한 참 후에야 바로 그 날이 발렌타인데이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상술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그 날, 2월 14일에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총기사고가 발생해서 17명의 안타까운 생명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꽃같은 자녀들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 유가족들에게 지난 한 주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암흑을 경험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주는 의미를 살펴 보았습니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왕정이 도입되기 전 단계인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없었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사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공동체가 움직여졌기 때문에 자유가 무한 보장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사시대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한 마디로 무법천지였습니다. 그 암울한 사사시대였기 때문에 룻기는 성경 전체에서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그렇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암흑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 1장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려서 도덕적으로는 무법천지였고, 영적으로는 암흑기였던 바로 그 때에 극심한 흉년마저 들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지만, 어쩌면 사사시대에 있었던 기근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신명기 28장의 율법에 의하면,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룻기의 이 암울한 시작은 사사시대가 전반적으로 기근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배교의 시대였음을 독자들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베들레헴 출신이었습니다.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였다는 것을 아는 독자들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과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은 ‘빵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의 본적지가 ‘빵집’인데도 불구하고, 그 곳은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역설로 룻기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빵집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모압으로 이민을 가야하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모압은 절대로 가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단,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흉년을 피해서 율법을 어기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포기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보려는 불신앙의 길인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어마어마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룻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짧은 룻기 전체를 여러차례 읽기를 시도하다가 3주째 읽고 있는 1장의 첫 부분을 넘기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자꾸만 같은 질문이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이름에서 조차 하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는 한 가문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서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 육신의 양식을 찾아서 떠나야 하는 그 기근의 시대에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셨을까요?
우리는 룻기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007년, 한국에서 크게 화제를 모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시절에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지금은 한국예술 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던 그 영화는 특히 기독교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는 영화의 내용만큼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이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밀양은 경상남도에 있는 작고 지극히 평범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그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밀양으로 설정했습니다. 밀양은 한자로 密陽 (비밀 밀, 볕 양), 즉 ‘비밀스런 햇볕’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Secret Sunshine 입니다. 다른 지역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곳, 그렇지만 비밀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을 주는 곳, 그곳이 밀양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신애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이었던 밀양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내려갔는데, 아들은 유괴 당해서 살해 당합니다. 절망 속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녀가 다시 회복된 것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부흥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그녀는 흔히 말하는 “은혜”를 받았고, 자신의 변화를 간증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교도소에 수감중인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힘으로 살인범을 면회 갑니다. 그런데, 그녀가 대면한 살인범은 전혀 예상과 달랐습니다. 얼굴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고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습니다. 당황함을 애써 감추며 신애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노라고, 그런데 살인범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거나 나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며 잘못을 비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이 곳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셔서 지금은 너무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애는 그 날 이후로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신애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신애가 하나님과 투쟁하는 중에 어느 공원에서 열리고 있던 부흥 집회를 방해하는 장면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주 고소해 할 장면이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면 아주 쓰디쓴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연합집회가 그러하듯이, 집회의 마지막에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스피커에서 갑자기 노래가 들립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기도 중에 이 노래가 들리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제각각 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소음이려니 생각하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기도를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노래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뜻인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의 유혹이다 싶은지, 목소리를 크게 높여 기도함으로 노래 소리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저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듣게 되는 내면의 소리를 상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 같은, 그래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분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입고 물질세계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또한 그 본질이 ‘미혹하는 자’인 악한 영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회를 노립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 마음에서는 늘 김추자 씨의 이 노래가 들립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에게도, 헌신과 희생으로 단련된 장로님에게도, 기도를 많이 하시는 권사님에게도, 최근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가슴이 따뜻한 집사님에게도, 얼마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신자에게도, 그리고 이제 막 하나님을 믿어볼까 저울질하고 있는 구도자에게도, 이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그냥 소음이겠거니 하고 무시하고 지날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그 노래 소리에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거짓말이 아닐까?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짜일까?”
어쩌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다 믿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노래 소리에 때로 솔깃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믿는, 혹은 믿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이 노래가 들리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조건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숨어 계시는 분’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스런 햇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하자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비밀스런 햇볕이요, 숨어 계시는, 침묵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과연 비밀스럽다고 해서 햇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영화 속에서 신애가 약국의 김 집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김 집사가 햇빛이 은밀히 깃드는 곳을 가리키 말합니다.
“저 빛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있어요”. 그러자 신애가 그곳으로 걸어가서 대답합니다. “여기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그냥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곳에 비밀 햇볕이 깃들어 내리쪼이고 있는데, 신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그동안 그토록 갈망해 왔던 햇볕이 그곳에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비밀스런 햇볕은 이렇게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룻기의 등장인물들은 종종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분의 자비에 대해서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작 주인공 룻에게는 철저하게 침묵하십니다. 죽은 남편의 나라, 죽은 시아버지의 나라에서 이방 여인 룻이 겪는 고단한 삶 속에서는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납니다. 심지어 룻기에서는 다른 성경들에서 흔히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수단으로써의 계시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말씀도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저 이상하게 겹쳐서 일어나는 우연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룻기의 진짜 매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숨어계신 하나님, 낮은 데로 임하시는 하나님,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나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존재를 감싸시는 하나님, 우리를 환각과 환상 속으로 도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 안으로 들어가 대면하고 끌어안아 그 현실을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 룻기는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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