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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5. 길 위에서(1)룻기 강해 2024. 2. 4. 19:07
20180311
룻기 1장 8~18절
몇 년 전, ‘두 개의 문’이라는 다큐멘타리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2009년 1월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이라는 철거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당시 철거민들이 재개발 보상과 관련해서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고, 종성을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불이나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불에 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영화 중간에 두 여인이 서럽게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인데, 며느리는 불에 타 죽은 철거민 중의 한 사람이 남편이고, 시어머니는 남편이 아들과 함께 농성하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감옥에서 형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남편이 불에 타 죽고, 시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여인이고, 한 사람은 아들이 불에 타 죽고, 남편이 감옥에 있는 지지리도 복 없는 여인들입니다. 그녀들은 울부짖습니다. 서럽게 울부짖습니다.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남편과 자녀를 잃은 여인에게 남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절대적으로 남자들을 의지해 살던 고대사회에서 여자들만 남았다는 것은 혼자 삶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5절과 6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저자가 말하는 ‘그 여인’은 누구일까요?
나오미 입니다. 룻기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나오미입니다. 따라서 나오미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엘리멜렉’ 조차도 ‘나오미의 남편’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이름이 사라져버린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 5절과 6절입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요? 왜 저자는 갑자기 나오미의 이름을 이야기 하지 않고 ‘그 여인’이라는 대명사를 쓰고 있을까요? 그것은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나오미에게 더 이상 개인의 독립적 가치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저자는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 여인’으로 불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의 번호를 부르지 않습니다.
옛날과 달리 한 교실당 학생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보통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습니다. 학기가 시작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학급 전체가 복도로 나와서 줄을 섰습니다. 키가 작은 학생부터 시작해서 일렬로 선 다음에 자기만의 번호를 부여받는 지금 생각해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부르는 것은 어찌보면 편리합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고, 성적이나 기타의 행정업무를 처리하기에도 아주 용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대에서 유격 훈련 받을 때는 누구나 ‘몇 번 올빼미’라고 불렸고, 훈련소에서는 ‘몇 번 훈련병’ 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아닌 번호를 부르는 것은 감옥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감옥의 죄수들에게는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인격을 갖춘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에 교도소에서 죄수들은 제도적으로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름을 회복하는 경우는 두 경우에 한해서 입니다. 형기가 만료되어서 출소를 하거나, 아니면 교도소 안에서 사형을 당할 때입니다.
이름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이름은 단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호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를 의합니다. 제가 아내와 동내를 산책하다가 종종 발생하는 헤프닝이 있습니다. 아내는 길가다가 예쁜 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반드시 ‘예쁘다’라는 감탄사를 열 번 이상 반복한 다음에 ‘예쁘지 않아요?’하고 저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에게 묻습니다. ‘이 꽃 이름이 뭐예요?’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응, 플라워.’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꽃이 아무리 예쁘다고 한 들, 내가 그 이름을 모르고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것은 나에게 평생 ‘그 냥 그 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가치가 소중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할 때는 이름이 불리워지고, 이름이 기억될 때 입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존재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모두 남편과 아들의 시신과 함께 땅에 묻고 ‘그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여인’이 이름을 회복했습니다. 다시 ‘나오미’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5절과 6,7절에서 잃어버린 이름이 8절이 시작하면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지요.
그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세 단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들었다’라는 동사이고, 또 하나는 ‘일어나다’라는 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돌아오다’입니다.
‘그 여인’으로 주저앉아 있던 나오미는 어떤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고국에서 모래바람을 타고 모압까지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한글 성경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사’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방문하셨다 The Lord had visited his people’’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흉년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즉 하나님의 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을 방문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문장을 신약의 용어로 바꾸면 어떤 말이 될까요?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그의 백성을 방문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나오미는 ‘복음’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고향 땅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은 나오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그렇습니다. 복음을 접한 나오미의 반응은 일어나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더 자신을 붙잡아 주저 앉히는 상처와 시간들에 얽메이지 않고 과감하게 일어났고, 돌아가는 길 위에 섰습니다.
그 길 위에서 나오미는 더 이상 ‘ 그 여인’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구원은 듣고, 일어나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친히 방문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을 신약의 용어로는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입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이 그것을 뜻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었다는 것은 나오미가 하나님께서 흉년이 난 이스라엘에 곡식을 주셨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사건과 동일합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과거와 죽음과 단절하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과감하게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길 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존재가치,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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