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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 강해 8. 엘 샤다이
    룻기 강해 2024. 2. 12. 17:12

    20180408

    룻기 119~22

     

     

    헤르만 궁켈이라는 성서학자는 최초로 구약성서 시편에 기록된 150편의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시편은 뜻 밖에도 감사나 찬양시가 아니라 탄원시였습니다. 자신의 슬픔이나 억울함 또는 고난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외치는 울부짖음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들은 주님, 어찌하여 잠잠하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심지어는 주님, 일어 나십시오. 그만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일어나서 저를 위해서 힘을 좀 써 주십시오.”라는 울부짖음 이었습니다.

     

    대체 그런 시를 쓴 사람들은 얼마나 믿음이 없었길래 인내하고 기다릴 줄을 모르고 이런 불평에 가득 찬 항변을 감히 늘어 놓았을까요? 그리고 성경은 도대체 왜 시편 23편 같은 아름다운 찬양시만 수록하지 않고, 이런 불신앙처럼 보이는 고백들을 성경 속에 포함시켰을까요?

     

    시편들 중에 가장 많은 시를 쓴 사람은 다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시편의 저자들은 대부분 제사장들이나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들 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가장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이 좋다는 말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저에게 해답을 요구할 것입니다. 적어도 목사나 사제라면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잘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제 능력으로는 믿음에 대한 하나의 간단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믿음에 대한 정의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에게 적용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뢰와 순종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의미와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의미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그 어떤 관념이나 신념이 아닌, ‘행동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위선과 반대되는, 그러니까 행동은 뒤 따르지 않고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 ‘말과 일치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믿음율법과 반대되는, 그래서 대단히 관념적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믿음을 말할 때는 많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념일 수도 있고, ‘성실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믿음이란 XXX이다식으로 말하거나, 또는 그런 식의 답변을 요구하는 경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에게 하는 말일까요?

    아마 머리 속에 떠 올려지는 그림이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믿음 좋은 사람은 주일 성수 잘 하는 사람, 교회 일 열심히 하는 사람, 입만 열면 하나님 예수님 이야기만 하고, 성경을  줄줄줄 외우는 사람, 기도한다고 주로 교회에서 사는 사람 등등일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 모든 항목 보다도 헌금 많이 하는 사람과 전도 많이 하는 사람이 최고로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좋다는 말도 쉽게 할 수 없는 종류의 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여지는 종교생활, 행여라도 그것으로 믿음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위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도 말고, 누가 믿음 좋은 사람인가를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허구한 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면서 나는 항상 기쁘고 행복하다, 또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고 목자이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나 두려움도 없다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시인들은 때로,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는 주님에게 속았습니다.’라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조차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부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의 본문에서 나오미는 뜻 밖의 고백을 합니다.

    먼 길을 걸어서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동네 사람들이 알아보고 모여들었습니다.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행색은 거지 꼴이었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녀를 반겨주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그녀를 맞았습니다.

     

    이게 누구야 나오미 아니야. 말론, 기룐의 엄마 나오미 맞지?’

     

    그러나 나오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20~21절입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녀는 자신을 더 이상 나오미로 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게 하시고, 있는 것 다 빼앗아 가버렸는데 더 이상 기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 자신은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마라괴로움또는 쓰다 bitter’란 뜻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불려지기 위한 호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고대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에는 모두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는 그 사람이 이름처럼 되기를 바라는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특별한 전환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높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난 다음부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기꾼이란 뜻의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싸운 다음부터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평생 사기꾼으로 불리우면서 사기꾼으로 살아야 할 존재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름이 바뀌고 존재가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이 타향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아내 넷과 아들 열한 명에 딸 하나를 거느린 부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둘째 부인 라헬이 아기를 낳습니다. 난산이었습니다. 불쌍한 라헬은 길에서 아기를 낳다가 죽어 갑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도 어미의 젖 한 번 빨지 못하고 자라야 하는 아기가 불쌍해서 눈이 쉽게 감기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지어주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죽자 옆에 있던 아버지 야곱이 갓난 아기를 안아 들고는 이름을 바꿔 줍니다. ‘베냐민으로 말입니다.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야곱의 심정이 이해가 되십니까?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불쌍한 아들이 이름마저 슬픔의 아들로 불리워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오미의 고백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버리고, 저주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그녀의 심정 또한 헤아려 볼 만 합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낄 정도의 처절함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녀가 하나님을 지칭하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녀는 전능하신 분이 자신을 괴롭게 했고, ‘전능하신 분이 자신을 불행하게 했노라고 한탄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전능자라고 반역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들에서 한결같이 ‘Almighty’로 번역한 것을 한국말로 전능자로 그대로 옮긴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명사입니다.

    히브리어 원어에는  שַׁדַּיShaddai ‘샤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산 봉우리의 신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번 짐작해 보십시오. 나란히 누워있는 산 봉우리 두 개는 무엇을 연상 시킵니까?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 시키지요. 그래서 샤따이를 직역하면 젖가슴의 신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 명칭으로 소개될 때는 풍성한 자손의 복을 약속하시거나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는 분으로 고백 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맨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하실 때도 이 단어를 쓰셨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나는 엘 샤따이, 젖가슴의 신이다.” 당연히 우리말 성경에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8장과 35장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은 나는 엘 샤따이, 젖가슴의 신이다. 아브라함처럼 너도 많은 후손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와 생명의 하나님이 나오미에게는 어떻게 고백되어집니까?

    그녀를 불행하게하고 괴롭히는 신으로 고백 되어집니다. 빈 손이었고, 불임이었던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는 풍요와 부를 약속하셨던 그 전능하신 분’, ‘샤따이하나님이 이 연약한 여인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모조리 빼앗아 가는 야박하기 그지없고 인정머리 없는 신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 괴롭습니다.

    성경의 이런 깊은 뜻을 꼼꼼하게 알고 읽으면, 룻기의 이 짧은 대목은 정말 읽기가 힘들어 집니다. 숨이 막혀 옵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주시오.”

     

    나오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하는 나오미를 믿음 없는 여인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아니 이런 고백을 하면, 정말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믿음 없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오미의 고백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포장하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 그것은 분명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 그 하나님은 나오미의 이런 불신앙에 가까운 항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비로소 하나님은 룻기 1장의 그 처절한 이야기의 끝부분에 짤막하게, 그러나 큰 울림으로 나타나십니다. 22절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빈털털이가 되어 나오미가 아닌 마라가 되어 돌아온 고향 땅에서는 이미 보리가 무르익어 추수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샤따이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이재무 시인의 서울 오는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돈벌이를 하러 올라가는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60, 70년대 많은 시골의 누나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열 대여섯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눈물겨운 상경을 했습니다. 병들어 누워계신 어머니의 무너지는 가슴과 울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청자담배를 피우며 딸이 떠난 먼 산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가난 때문에 죽은 동생을 생각하며 열차 안에서 울고있는 우리 누님들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부분만 읽어 보겠습니다.

     

    “..........

    평생을 가도 가 닿지못한

    그러나 기어이 가야만 하는

    멀고 험한 길 가며

    바닥을 잊은 가슴 샘에서

    솟는 눈물은 또 얼마나 퍼 올려야 하는 것인가

    멀미가 일어

    달게 먹은 점심의 국수가락 토해내며

    서울 오는 길

    고향은 끝내 깎지 낀 내 몸

    풀지 않았다.”

     

    고향은 끝내 깎지 낀 내 몸 풀지 않았디라는 마지막 구절은 저에게 룻기 1장의 마지막 장면을 떠 올리게 합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샤따이하나님은 이렇게 희망 한 자락을 절망의 인생들에게 깔아 놓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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