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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강해 10. ‘우연과 필연’
    룻기 강해 2024. 2. 12. 17:24

    20180422

    룻기 22~4

     

     

    혹시 기억에 남는 수필이 있으십니까?

    저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란 수필을 듭니다. 2007년 향년 97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피천득 선생님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가 동의하는 대표적인 소년입니다.

    인연이란 수필에는 선생님이 동경 유학 시절 하숙집 딸이었던 아사꼬와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아사꼬가 아주 어린 국민학생 시절에, 또 장성해서 대학생이던 시절에,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주둔한 미군의 아내로 시들어가는 모습으로 두 사람은 만납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몇 번을 되뇌어도 너무나 애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감동적인 것은 아마도 각자들 가슴에 묻어둔 인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인연이란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인연(因緣)이란 말은 원인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인 직접 원인을 뜻하고, ()은 이를 돕는 외적 ·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두 글자를 합쳐서 원인의 뜻으로 사용하지요. 그래서 당연히 이 단어는 결과를 수반합니다. 원인과 결과는 합쳐저서 인과율이라는 법칙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아름다운 수필로 시작했는데, 딱딱한 철학용어가 나오니까 김새지요.

    우리는 인과율의 원리에 의해서 세상을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현재 나의 모습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오늘 나의 모습은 미래에 있을 내 모습에 대한 원인이 됩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넓게 떠 본다면, 세상에는 원인을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과율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가 우연입니다.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 이렇게 네 식구가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이민을 갔고, 장성한 두 아들은 모압 여자와 결혼해서 살았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인생 역전을 꿈꾸며 이민을 왔건만, 집안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객지에서 죽어버려서 나오미는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집안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편의 뒤를 이어 두 아들도 차례로 죽어버렸습니다. 생각할 수록 묘한 이야기입니다. 남자 셋이 죽고 여자 셋만 남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과부 셋만 남았습니다. 드디어 나오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나오미의 계획은 혼자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 세 남자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 걸어왔던 그 길을 이제는 늙고 지친 과부 혼자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지리 복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나오미는 남편을 잘 못 만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며느리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 때문에 허락하지 못합니다. 자기 한 몸 편하자고 며느리 둘을 데리고 갈 수도 있지만, 젊은 그녀들에게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은 타국이고, 남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 삶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오미는 따라나서는 며느리들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눈물로 매달리는 며느리들과 눈물로 호소하는 시어머니의 실랑이 끝에 한 며느리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한 며느리는 죽어도 못가겠다고 매달리며 끝내 나오미와 동행합니다.

     

    그녀들은 드디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고향 땅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 과부의 삶은 막막하기만 했고, 며느리 룻이 결단을 합니다. 때마침 보리를 추수하는 계절이 되어서 추수하는 밭에 이삭을 주으러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는 곡식을 추수 할 때, 밭의 네 귀퉁이에 있는 곡식을 베지말고 그대로 두어야 했습니다. 또 곡식을 베다가 흘린 것들은 주워서는 안됩니다. 먹을 것 없는 고아와 과부 또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위해서 일부러 남겨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할 수록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것이 그저 조상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오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룻은 추수하는 밭에 이삭을 주으러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찾아간 밭이 우연히도 죽은 시아버지의 친척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진행된 룻기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3자의 시선이 아닌, 등장인물들의 시선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대략 15년 동안의 일입니다. 주인공 나오미가 봤을 때, 하나님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1:13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1:20

    “……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1:21

     

    나오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처음 등장하시는데, 하나님이 하신 일은 불쌍한 여인을 괴롭게 하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치신 분이고, 괴롭게 하셨고, 있는 것을 모조리 가져가셨고, 그녀를 불행하게 하신 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떤 깊은 뜻을 가지고 세밀하고 꼼꼼하게 나오미를 위해 뭔가를 하시는 분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좀 너무 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그 때는 우연히 보리 추수가 한 창일 때였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친척이 한 명 살고 있었는데, 부자였고 영향력이 있었던 보아스였습니다. 우연입니다. 늙고 배고픈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룻이 추수하다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보려고 바구니를 들고 찾아간 밭은 우연히친척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허리를 숙여 이삭을 찾고 있는데, 때마침 보아스가 일하고 있는 하인들을 격려하려고 자신의 밭에 나타났습니다. 우연입니다. 모든 것이 우연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셍깁니다.

    우연이란 말의 문제입니다. 어찌보면 우연이란 말은 지극히 믿음 없는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룻기의 저자는 왜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았고, 왜 하나님이 보아스를 이끌어서 그 많은 보아스의 밭 중에서 룻이 일하러 나와 있는 그 밭으로 인도하셨다고 기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우연히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라고 하지 않고, ‘우연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지혜를 동원해서 이 세상에 감춰져 있는 여러가지의 법칙들을 밝혀 냈습니다. 세상이 제 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 Rule’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 중에서 재미있는 것이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같은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인과율이라는 법칙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적용되는 대표적인 두 분야가 역사와 물리학입니다. 역사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삶의 방향들을 제시해 주고 미래를 어느정도 예측해 주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입니다. 또한 과학의 기초가 되는 물리학의 기본은 운동입니다. 힘이 가해지는 원인이 있어야 운동의 결과가 설명이 됩니다. 이 법칙은 모든 과학에 적용이 됩니다. 아니, 인과율이 없다면 과학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나온 말이 인연입니다.

    가장 쉬운 예가, 오늘 이 세상에서 누군가와 옷깃을 한 번 스치려면 전생에서 그 사람과 최소한 500겁의 이상을 만났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겁이란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서 집 한채 만한 바위를 없애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들도 우연이란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연이란 단어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행운이나 불운이라는 말도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입니다. 모두가 믿음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히틀러라는 살인마에 의해서 유태인 6백만 명이 살해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한민국이 일제에 의해 36년간 식민통치를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흑인이 인종차별을 받는 것도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 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다르다는 것,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과 인간이 원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8~9

     

    하나님에게는 하나님 나름대로 정하신 길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는 수많은 우연들로 이루어진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 우연들을 따라가다 보면 룻기를 읽는 모든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야기의 끝에서 우연의 배후에 감춰졌던 필연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일에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우연을 통해서 일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영영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겨 두기도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우연과 필연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수 많은 필연의 씨앗들을 우연 속에 뿌려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헤세드, 은혜라고 고백 될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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