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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2. 사랑으로 채우다룻기 강해 2024. 2. 12. 17:32
20180513
룻기 2장 17~23절
영어가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우리 말들 중에 여백(餘白)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영어의 space나 blank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백’이라는 어감이 주는 분위기는 그냥 ‘빈 공간’과는 사뭇 다릅니다. 빈 공간에서는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백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백의 미’라는 말도 있지요. 여백이란 단어에서 ‘여’자는 남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남는, 또는 남겨진 공간을 가리키는데 ‘흰백 白’자를 사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원래 이 글자는 그림 그리는 종이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서양화와 동양화가 가진 중요한 차이는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서양화는 기본적으로 캔버스를 색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동양화는 어떻습니까? 먹이 지나가지 않은 흰 종이 그대로의 공간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백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너머서, 우리는 상상으로 또는 이야기로 그 남겨진 여백들을 채워갈 수 있기 때문에 여백은 무수히 많은 재창조를 이끌어 냅니다.
여백은 미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해서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고정희 시인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은 누군가가 남기고 간 여백에 젖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떠나간 자리에 여백을 남깁니다.
사랑의 여백을 남기기도 하고, 상처의 여백을 남기기도 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늘 사랑의 화신으로 남겨지는 어머니의 떠난 자리에 ‘선산보다 큰 여백이 남아 있다’고 시인은 고백헸습니다. 그 여백은 늘 생각하게 하고, 그리워하게 되고, 또 마음에 포근함을 안겨 주기에 여백은 ‘탄생’이라고까지 시인은 고백합니다. 자녀들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떠나고 난 다음, 그 부재가 가져다 주는 여백이 만들어 집니다. 문제는 그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나가느냐 입니다.
여백과 비슷한 말 중에 간극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간극(間隙 사이 간, 틈 극)은 두 물체나 관계에서 최대의 차이(거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간격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차량 간의 간격, 벽과 가구와의 간격 등에 사용되는데 보통은 이러한 공간이나 거리는 필요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정해 놓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간극은 두 물체 또는 추상적으로 두 개념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 등을 의미하는데 이럴때 사용하는 간극은 대체로 원하지 않는 틈새를 의미합니다. 아직도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다. 이런 것처럼 차이점, 틈새 등의 의미로 자주 사용합니다.
관계가 아름다워지려면 반드시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여정을 지나면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을 채워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백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관계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 창조되어 갑니다.
그 여백이 점점 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여백에 갈등이 또는 불신이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여백이 커지고 관계는 멀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틈새는 더 이상 여백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간극이라고 부릅니다.
제 아내가 유투브를 통해서 종종 보던 한국의 TV 프로그램 중에 ‘다문화 고부열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국제결혼이 친숙하게 된 한국사회의 새로운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대부분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겪는 갈등과 그로인해 생기는 어려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르뽀형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룻과 나오미를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에서 룻기는 주로 어버이 주일에만 설교되어지는 본문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으로 어머니를 공경해야 룻처럼 큰 복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시각으로만 룻기를 대하면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나오미는 유태인입니다. 즉, 스스로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축복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갇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룻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 모압사람입니다. 언약백성인 유태인들로부터 개취급을 당하던 민족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력이 있어도 그들은 영원히 유태인 공동체에 들어올 수도 없는 저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문화 고부열전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 널려있는 화장터에서 일하는 불가촉 천민, 그러니까 네개의 카스트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천민 출신의 아가씨가 한국에 시집와서 기독교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겁니다.
말은 잘 통했을까요? 생활 방식은 어땠을까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이 되는 분위기입니다. 더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둘 다 과부였다는 사실 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환상적인 조합입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가 친정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눈물로 물리치고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역 이민을 왔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개처럼 여기는 시어머니의 민족들 속에서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민족을 상종해서는 안 될 부정한 사람들로 낙인을 찍어버린 시어머니의 신을 섬기겠노라고, 그러니 제발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1장 15~16절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다문화 고부열전에서는 고부간의 간극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여행을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주로 며느리의 친정집을 방문해서 며느리의 가정형편과 가족들과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며느리의 성장과정, 또는 서로 다른 문화들을 체험하면서 서로의 멀어진 간극을 ‘이해’로 메꿔나가는 훈훈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룻과 나오미는 그 여백을 성공적으로 메꿔나간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룻기 2장부터는 특이하게도 대부분이 대화로 채워집니다. 저자의 나레이션이 최소한으로 줄어들고, 독자들은 마치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대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룻이 보리추수가 한 창인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눈에 띄어서 특별 관리를 받습니다. 보아스는 이방여인 특히나 과부의 몸으로 억센 남자 일꾼들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어있는 룻을 보호합니다. 그녀에게 다른 밭으로는 절대 가지말고 자신의 밭에서 일하는 여자 일꾼들에게서 떨어지지 말것을 당부합니다. 다른 남자 일꾼들에게는 절대로 그녀를 건드리지 말것을 경고하고, 일꾼들을 위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음껏 마시게 하고, 심지어는 그녀를 위해서 추수한 곡식을 일부러 흘리라고까지 당부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들판에서 먹는 저녁식사에도 초대해서 음식을 먹게 하더니 추수한 곡식을 자루에 싸 주기까지 합니다. 룻은 밭에서 주운 이삭들과 보아스가 따로 챙겨준 곡식, 또 저녁식사를 하면서 시어머니를 위해 챙겨 둔 음식들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시어머니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갑니다.
나오미는 이것저것 묻습니다. 어디에서 누구의 밭에서 일을 했길래 이렇게나 많이 곡식을 가져 왔는지, 보자기에 싸 온 음식들은 어디서 났는지, 일은 할 만했는지, 위험한 일은 겪지 않았는지……
룻은 그 날 밭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어머니에게 소상하게 말해줍니다.
해답은 이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문화 가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아무런 거리를 느끼지 않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 줍니다. 심지어 외간 남자에게 받았던 호의, 그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는 것 까지도 남김없이 말해 줍니다. 시어머니는 그 사람을 축복해 줍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신뢰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여백은 간극으로 벌어질 틈이 생기기 전에 이미 무언가에 의해서 메꾸어 졌습니다. 그것이 사랑과 신뢰입니다.
오늘 룻기 2장의 마지막절은 평범한 문장이지만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면서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 그러면서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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