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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1. 모압여인룻기 강해 2024. 2. 12. 17:31
20180429
룻기 2장 4~13절
역사적인 하루였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우리의 눈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생중계 되는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세상에 이런 일이”였습니다. 더구나 2014년 4월에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되어 가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세상에 이런 일이”를 연발하며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군사분계선을 손잡고 넘어갔다 넘어오는 두 정상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를 연발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울었습니다. 시드니에 계시는 친구 목사님이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이렇게 소감을 적어 놓았습니다.
“부모님 생전에 두 분의 고향을 꼭 모시고 가고 싶다.”
한국에 계시는 목사님의 부모님은 얼마나 우셨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김정은의 언행을 보고도 많이들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를 격정적이고 세상 모르고 날뛰는 30대 초반의 반항아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을 치르는 그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예의 바르고 절제되고, 그의 할아버지처럼 호탕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루 동안 우리가 접한 그의 모습은 최소한 감정에 휘둘려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망나니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살피고 있는 룻기는 ‘흔히 우리가 ‘은혜’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누구에게 어떻게 임했는가?’의 이야기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카리스’, 영어로는 Grace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구원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인간의 선행이나 어떤 대가를 담보로 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업적인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카리스’입니다. ‘공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바울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력이 하도 강해서 그런지, 사람들은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바울식의 개념을 떠 올려 버립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헤세드’라는 단어는 맥락이 분명히 다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헤세드와 사람이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헤세드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반드시 ‘언약’과 관련됩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에게만 적용됩니다. 그 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유대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자신들을 ‘언약백성’이라고 칭하고 이방인들과 구별했습니다. 이방인은 누구를 말할까요. 유태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에 해당됩니다. 무섭지요.
그래서 극단적인 과격파 유태인들은 ‘개같은 이방인’이란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습니다.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은 오염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과 혼인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 되었으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흉내내는 것도 금지 되었습니다. 물론 이방인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호주 시민권보다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 공동체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는 두 민족이 있었는데, 바로 모압과 암몬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두 민족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모압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했고, 암몬 사람들은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이 율법에 추가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다분이 유태인들의 민족적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인간이 태생적으로 문란한 기질과 우상숭배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유태인들은 모압과 암몬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좋지 않은 감정의 뿌리를 두 민족의 출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고 있었습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의 출발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기록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천사들이 아브라함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소돔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천사들의 임무는 잠시 후면 멸망할 그 도시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을 구출시켜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이었습니다. 롯에게는 아내와 결혼한 두 딸이 있었는데, 사위들은 피하라는 천사들의 말을 거부하고 도시에 남았고, 롯의 아내는 피신하는 도중에 죽었습니다. 결국 롯과 그의 두 딸만 목숨을 건져서 동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기록이 나오지요. 롯의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깊이 잠들게 한 뒤에 차례대로 아버지와 동침해서 임신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딸들이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이 모압, 둘째가 낳은 아들이 벤암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모압과 암몬 자손의 선조가 되었다고 창세기의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36~38절.
“롯의 두 딸이 드디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큰 딸은 아들을 낳고, 아기 이름을 모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모압 사람의 조상이다. 작은 딸도 아들을 낳고, 아기 이름을 벤암미라고 하였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암몬 사람의 조상이다.”
흥미롭다고 하기보다는 민망한 내용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시험들기 딱 좋은 대목이지요. 아무튼 유태인들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모압과 암몬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을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이 기록에 근거한다고 내세웠습니다. 근친상간으로 생겨난, 출발부터 음란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19장의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기록 자체가 후대에 민족적 우월감과 분리주의에 입각한 과격한 유태인들에 의해 삽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기록이라는 해석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의견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기록 자체는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 경우에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과연 롯과 그 딸들의 행위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가?”입니다. 어떻습니까? 성경 어디를 봐도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인 평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창세기의 저자도 그들의 행동이 ‘근친상간’으로 규정되는 심각한 범죄행위였다거나 하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유태인과 두 민족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유태인들이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개취급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의 부분에서도 그런 풍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모압여인 룻은 굶주린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나갑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잠시도 앉아 쉬지않고 허리를 굽힌 채 열심히 이삭을 줍습니다. 때마침 밭주인 보아스가 일꾼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타났다가 룻을 눈여겨 보고 일꾼들에게 묻지요. “저 젊은 여인은 누구냐?” 그러자 일꾼이 대답합니다. 6절.
“저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사람입니다.”
일꾼의 대답이 특이합니다.
그냥 ‘나오미의 며느리입니다’, 또는 ‘모압에서 온 죽은 엘리멜렉의 며느리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유난히 ‘모압’이란 지명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일꾼의 대답에는 모압에서 온 젊은 과부를 대하는 유태인들의 태도가 묻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진행시켜 보면, 보아스는 일꾼의 말을 듣고 일부러 룻을 불러서 말합니다. 그런데 그 분위기는 단순히 호의를 베푸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로 부터 그녀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8~9절 입니다.
“여보시오, 새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마시오. 여기를 떠나지 말고,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시오. 우리 일꾼들이 곡식을 거두는 밭에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절대로 다른 밭으로는 가지 말고,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지 말고 우리 여자 일꾼들의 뒤를 바짝 따라 붙어서 다니라는 의미심장한 단속입니다. 조금 더 나가 봅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분위기를 짐작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 룻이 시어머니에게 그 날 일어난 일을 상세하게 말하자,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2절.
“얘야, 그가 데리고 있는 젊은 여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좋겠구나.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다른 밭으로 가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본문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네가 그 댁 아낙네들과 함께 일하러 나가게 되었다니, 참 잘되었다. 다른 밭에 갔다가 남자들에게 욕을 당할 염려가 없게 되었구나.”
그렇습니다. 룻은 자칫하면 남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다가 일하는 남자들에게 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절대로 너에게 손대지 말라고 당부하겠다는 말 속에서는 그런 일은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 할 수도 있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무나 쉽게 건드려도 되는 잡초처럼 여겨지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모압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그 분의 놀라운 ‘헤세드’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서 통념과 전통, 편견과 선입견을 깨부수고 룻에게 임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입니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가슴 벅찬 축복입니다.
남의 일인데, 수천년 전에 있었던 우리 하고는 전혀 다른 문화와 민족의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벅찬 감동을 느끼는 우리에게까지 다가 옵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이민자로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절절하게 와 닿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민자들이 언어와 인종,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장벽을 경험합니까? 얼마나 많은 이민자의 자녀들이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힘들어 합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적지 않은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환대와 포용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우리 역시 그 은혜를 흘려 보내야 합니다. 행여라도 근거에도 없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헤세드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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