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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3. 5월의 삼위일체 주일룻기 강해 2024. 2. 12. 18:14
몇 년 전, 한 자매님이 예배가 끝나자 저에게 물었습니다.
“해마다 5월에는 왜 검은 셔츠를 입으세요?”
아마도 그 자매가 보기에도 일년 중 가장 화창하고 쾌적한 브리즈번의 5월에 검은 셔츠를 주일마다 입고 오는 저의 모습이 이상했나 봅니다.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5월에는 유난히 추모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오죽했으면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웠겠습니까? 북반구의 5월은 꽃이 흐드러지고 바람도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우리는 비록 남반구에 살고 있지만, 어찌보면 여기서도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그리고 날씨는 이보다 더 화창할 수 없는 환상적인 계절입니다.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특히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특히나 한국에서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성년의 날’ 등등… 가장 즐거운 일들이 많은 달에 말입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 잔인한 4월이 4.19 혁명 기념일에서 5월의 5.18,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도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광주민주화 운동 38주년 기념주일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런 예배를 꼬박꼬박 기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예배들을 통해서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세월호’ 같은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형상이야말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키는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부활과 삼위일체’입니다. 그나마 ‘부활’은 신약성경에서 목격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그 모양과 활동은 독립적인 세 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세 분도 결국은 한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논리가 허무맹랑하게 들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분이라는 기이한 교리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교리입니다.
혹시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사람을 보거든,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이단입니다. 아니면, 뻥쟁이 입니다.
삼위일체는 당사자인 예수님 조차도 설명하기 난감한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이 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결코 이해 될 수도 설명 될 수도 없습니다. 그 것은 신비로 남겨두어야만 합니다. 만약,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교리로 접근하면 삼위일체의 신비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를 세우려 애썼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는 수백년 동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서로 자기 설명이 맞네 틀리네 하며 서로 싸우고 비난하며, 정죄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삼위일체가 그럴 가치가 있는 교리일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셋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삼위일체는 그냥 무작정 믿어야 할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창조와 구원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드러내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사랑으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가 본떠 만들어야 할 새로운 관계의 모델입니다.
16세기 러시아 수도자였던 안드레이 류블레프는 그 유명한 삼위일체를 나그네가 나누는 밥상의 친교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혹시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열 명 중 아홉 명은 맨 가운데 앉아 계신 분을 성부 하나님으로 지칭합니다. 왜 그렇지요? 우리 머릿 속에는 맨 가운데 자리가 상석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삼위일체 하나님도 계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가장 높은 분, 그 다음은 성자 예수님, 서열 3위가 상령님 이라고 말입니다. 이 그림이 위대한 이유는 우리의 그런 생각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계급이 없습니다. 그림 상으로는 전혀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화가는 하나의 힌트를 제공해서 성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맨 외쪽에 앉으신 분이 성부 하나님입니다. 오른 쪽의 두 분이 고개를 돌려서 왼쪽에 앉은 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강조하는 것은 함께 모여서 서로 응시하며, 서로 초대하고, 서로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를 통해서 삼위일체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요즘 일부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창조과학’에 등장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창조의 하나님’이란 피조물인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신성)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어떤 차별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존재하며,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예수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겪으러 오셨고, 가난한 이들과 권력이 없는 이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정치범 처형 방식인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인 예수는 구원이 어떤 도통한 종교적 수행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애틋함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돌리는 행동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입니다. 정의는 바로 이 위에 서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세상 위에 골고루 내려 생명을 키우는 단비 같은 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저마다 은총의 선물을 주어, 그 선물을 이용해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일까요, 경험의 대상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가슴에 품고 애틋하게 여기고 기도하고 사랑할 때 경험되어지는 분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응시하고 내 안에 초대해서 나의 아픔으로 삼을 때 경험되어지는 분입니다.
아직까지 룻기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일은 ‘우연’이었고, ‘때마침’ 즉, 전혀 예측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과부들의 넋두리에서 추수를 하느라 바쁜 보리 밭으로 들어 왔습니다. 남편 읽은 과부들의 곡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셨고, 전능하신 분이 나를 이처럼 모질게 하셨다”는 넋두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황량한 들판의 모래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누렇게 익은 곡식단들 사이로 바쁜 일꾼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이삭을 줍는 아낙네들의 잡담하는 이야기들도 들려 옵니다. 그 속에 희미하게 모압여인 룻의 굽힌 허리가 모입니다. 가끔씩 허리를 펴서 땀을 닦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이삭을 줍는 그녀가 보입니다. 아, 저기 멀리서 일꾼들의 인사를 받으며 자신의 밭을 둘러보는 보아스도 보이네요. 그리고 들판에 차려진 식사 자리에 같이 앉은 보아스와 룻이 보입니다. 날이 저물자 작은 집 안의 희미한 불빛 아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그림자도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으십니까?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대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20세기 초 화가 앙리 마티스는 ‘춤’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옷을 입지 않은 무용수들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나체는 우리가 태어난 삶의 본연이고,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고, 원은 그들이 만든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춤을 추는 운동이 더 중요합니다.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신비스럽기 까지 합니다. 정지 된 그림 속에서 우리는 속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춤 동작들 속에서 서로를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앙리 마티스-춤(Dance 1910)
성도 여러분, 신앙은 뜻풀이가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는 춤추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춤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삼위일체가 가진 이 두 가지 차원은 교회에 선교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함께 손을 붙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예배를 이런 삼위일체의 춤으로 만들 수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지닌 고통을 함께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며, 함께 시련을 이겨낼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밥을 나누고, 자신의 피를 나눌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사회와 역사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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