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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5. 안식을 위해 안식을 포기하다룻기 강해 2024. 2. 12. 18:39
20180624
룻기 3:14-18
오늘도 예배를 통해 안식 얻기를 원하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 된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간에도 누군가의 쉼을 위해서 자신의 쉼을 포기한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혹시 이 사진 기억하십니까?
몇년 전 터키 해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알라인 쿠르디라는 두 살 난 소년의 사진입니다. 우리도 예배 전에 저 소년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되고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마저 보장되지 않는 조국을 떠나서 한 자락의 쉼이라도 누리기 위해서 바다를 떠돌다 배가 뒤집혀 시신으로 남의 나라 해변까지 떠밀려 온 가엾은 소년이 입고 있었던 옷과 신발은 이틀 전에 아빠가 생애 처음으로 사 준 새 옷 새 신발이었다는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새 옷과 신발을 신은 아이는 아마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어려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평화를 맛보고 살 수 있다는 무참하게 짓밟혀 버린 두 살 소년의 희망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아랍 세계가 각성을 하는 것 같았고, 난민 때문에 복잡해지는 국내 사정, 즉 자국의 손익계산에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유럽연합도 각성을 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상황을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저는 SNS를 통해서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습니다. 중동의 사우디 아라비아의 끝 부분에 예멘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도 한국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약 20년 전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랍 특유의 부족간의 분쟁과 종파적 차이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전이 쉴새 없이 발생하다가 급기야 3년 전부터 내전은 전국으로 확산이 되고, 그 와중에 수만 명이 죽고 난민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바로 예멘 난민 500여명이 제주도에 들어 왔습니다.
그들이 제주도를 택한 것은 제주도 관광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 세계의 모든 나라에 대해서 비자없이 입국이 가능하도록 법으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의 하나로 알려진 한국의 제주도에 상륙했고, 공식적인 난민 자격을 신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에 들어 온 예멘 난민 500명을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청원입니다.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러한 청원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간 지 불과 10여일 만에 서명한 사람이 35만명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테러와 범죄의 가능성이 높고, 그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면 정착을 시켜야 하고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일자리가 잠식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거들었습니다. 그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에 동조하면서 댓글을 달아 놓은 사람들의 주장을 보니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만적인 행위입니다.
그들을 다시 바다 위로 돌려 보내서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해변에 밀려와야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한국이 저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자기들 혼자의 힘으로 잘 살게 되었습니까? 불과 몇 십년 전까지 해외에서 들어오는 원조 물자에 의해 의식주를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나라에서 버려진 아기들도 돌보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 수출을 가장 많이 했던 나라 주제에,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앞장 선다는 사실이 정말 개탄 스럽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쉼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로부터, 폭력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기근으로부터 불평등과 소외로부터 쉼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피부색과 종교와 사상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쉼의 권리를 자신의 힘으로 누릴 수 없다면, 주변에서 나서서 그가 쉼을 누릴 수 있도록 강제로라도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끊임 없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선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돕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온 나오미와 룻을 오늘 우리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녀들의 신분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바로 난민입니다. 기근 때문에 그녀들은 난민이 되어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밭주인 보아스는 난민 룻이 자신과 친척관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를 도와 주었습니다. 바로 난민, 과부, 사회적 약자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헤세드’에 응답하는 것임을 룻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룻기 3장에 들어와서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위해서 민망하고 망칙스러운 일을 꾸미고 룻도 시어머니의 계획에 찬성하는 모습을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았습니다. 룻은 드디어 시어머니가 시킨대로 목욕을 하고 몸에 향수를 뿌리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타작 일을 마친 일꾼들과 술과 음식을 들고 기분 좋게 취한 보아스가 잠자리에 든 것을 확인한 룻은 보아스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그의 잠자리에 들어 갑니다.
나오미와 룻의 계획은 순조롭게 성공할까요?
깊이 잠이 들었던 보아스가 새벽녘에 몸을 뒤척이다 잠이 깼는데, 자신의 옆에 여자가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보아스의 질문에 룻이 많이 두려웠나 봅니다. 그녀가 룻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보아스는 그녀를 안심시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현숙한 여자라는 사실은 온 동네가 익히 알고있다.”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나를 안아 주십시오. 당신은 저의 ‘고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생겼습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소. 하지만 그대를 맡아야 할 사람으로,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있소.”
다시 말하면, 나오미와 룻에게 고엘의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2순위라는 거지요. 참 드라마틱하지요. 나오미는 사람을 잘 못 골랐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룻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 지경까지 왔는데 자칫하면 그냥 이용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시어머니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룻을 보아스는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1순위는 아니지만 1순위가 되는 당사자를 만나서 딜을 해보겠다는, 그리고 반드시 자신이 바로 그 ‘고엘’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보리 ‘여섯 되’를 싸 주면서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밭에서 나온 룻은 집으로 가서 시어머니에게 자조치종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의미심장한 대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8절 개역개정.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는 아마 이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말투는 엄청나게 비장합니다. 심지어 보아스가 오늘 안으로 이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이제 룻과 나오미는 물론 우리 모두가 숨 죽이며 보아스를 지켜 봐야 합니다.
한 번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압에서 온 과부 난민을 위해서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는 보아스의 모습을 말입니다. 사실 나오미가 이 일을 꾸민 것은 고생하는 안쓰러운 며느리 룻에게 쉼을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3장 1절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시어머니가 이런 민망한 계획을 세운 것은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며느리에게 진정한 쉼, 즉 안식을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녀는 며느리의 안식을 위해서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고 모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룻의 쉼을 위해서 자신의 쉼을 포기한 또 한 사람이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는 지금 죽은 나오미의 남편과 1순위로 가까운, 고엘의 자격을 갖고 있는 친척을 만나서 어려운 협상을 벌이기 위해 쉼을 포기하고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그렇게 이루어 집니다. ‘헤세드’를 위해서 누군가 희생하고, 누군가 안식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요?
룻기의 저자는 수수께끼 같은 암시를 통해서 이 일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열심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밤에 자신의 잠자리에서 룻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들은 보아스가 룻을 안심시키며 보리를 싸 주는 장면입니다. 15절 입니다.
“걸치고 있는 겉옷을 이리 가지고 와서, 펴서 꼭 잡으시오.” 보아스는, 룻이 겉옷을 펴서 잡고 있는 동안,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그에게 이워 주고는 성읍으로 들어갔다.
보아스는 룻의 옷에 보리 여섯 되를 담아 줍니다. 왜 하필 여섯 되였을까요? 성경에서 상서로운 숫자는 3아니면 7입니다.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며, 7은 완전하신 하나님을 뜻한다고 해서 ‘완전 수’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7은 럭키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지 않습니까? 왜 보아스는 기왕 줄거면 일곱 되를 주지 않고 여섯 되를 담아 주었을까요?
저자는 보아스의 이 행동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부족한 한 숫자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기막힌 복선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부자이고 덕망있는 사람이어서 유력한 자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마지막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놓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열심이 필요합니다.
룻의 안식을 위해서 나오미와 보아스가 안식을 포기한 것 같이 하나님도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열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조화를 이루어서 ‘헤세드’가 이루어 집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전쟁과 기아와 두려움의 공포로부터 안식을 누리기 까지 안식을 포기하시는 하나님을 시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121편 4절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난민이며 과부인 룻의 안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는 나오미와 보아스의 행동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작은 안식 역시, 누군가가 기꺼이 포기한 안식의 시간임을 깨달아, 때로는 나의 안식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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