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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강해 14. 헤세드와 희생
    룻기 강해 2024. 2. 12. 18:32

    20180617

    룻기 3:1-5

     

     

    오늘 우리는 룻기에서 최대의 고비를 맞이 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룻은 고향 모압 땅에서 이민자 가정, 즉 외국인 노동자 가정으로 시집을 왔으나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버렸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형제, 그러니까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어버리고, 졸지에 과부 셋만 남았습니다. 절망과 탄식 끝에 시어머니는 고국으로 역이민을 결정하고 며느리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아직 젊기 때문에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 출발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수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고향과 집을 떠나기로 결정 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런 결정에 이르게 했는지 저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강한지만 이야기 해 줄 뿐입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친정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라고 간청하는 시어머니에게 룻도 역시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죽음이 갈라놓기 까지는 절대로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결국 과부 나오미와 과부 며느리 룻은 나란히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에게는 돌아온 것 이었으나, 룻에게는 유대인이 갖고있는 모압에 대한 전통적인 멸시와 적대감 같은 차별과 불평등을 견뎌야 하는 낯선 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돌아 온 고향에서 그녀들을 반기는 것은 생계에 대한 막막함 뿐이었습니다.

    추수를 하고 있는 남의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처절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주저 앉아있지 않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룻의 상황을 잘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을 줍기위해 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룻이 가야 할 곳은, 모압에서 온 더구나 과부인 자신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낯 선 들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무르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풍요로운 들판은 그녀에게는 모멸감과 비웃음, 억센 남자들의 추근거림 …. 나아가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에 노출된 곳 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밭주인 보아스가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자신의 밭에서 일하는 여자 일꾼들의 뒤에 바싹 붙어서 일을 하라고 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절대로 그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엄하게 당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룻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하고 들판에 나갔는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에 대한 그런 지극한 효성이 밭주인 보아스를 감동시켰고, 보아스는 룻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의 친척이며, 자기 가문의 고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까지가 룻기 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제 전형적인 이야기의 방식에 의해서 마음씨 착한 룻이 대박 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고,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교훈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솔직히 룻기에서 가장 설교하기 힘든 부분이 3장입니다. 어쩌면 룻기 뿐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서도 해석과 적용을 하기가 몹시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오늘 룻기가 우리에게 최대의 고비라고 말 한 이유입니다.

     

    2장 끝부분과 31절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룻을 불러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제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재혼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방법을 자신이 제시해 줍니다. 며칠 전부터 룻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부자이면서 자신의 친척인 보아스를 유혹하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너무 구체적이고 치밀합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입니다.

     

    잘 들어 보아라. 오늘 밤에 그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탈곡할 것이다.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서,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가 잠자리에 들 때에, 너는 그가 눕는 자리를 잘 보아 두었다가, 다가가서 그의 발치를 들치고 누워라. 그러면 그가 너의 할 일을 일러줄 것이다."

     

    아마 그날이 보아스의 밭에서 추수한 곡식들을 탈곡하는 날이었나 봅니다.

    그 지역은 낮이 너무 더워서 서늘한 저녁에 탈곡 작업을 합니다. 밤 늦도록 작업을 하고 일꾼들은 밤에 술과 야식을 먹고 밭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합니다. 아마 밭 주인 보아스도 일꾼들을 감독하고 그들과 함께 한 잔을 하고 야영을 할 것입니다.

    밤늦게 까지 힘들게 일하고 피로를 달래기 위해서 술을 거나하게 마신 억센 남자들이 그 다음에 주로 무엇을 찾을까요? 사실 당시에 그런 작업장을 다니면서 남자들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욕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 보아스가 어느 천막에서 자는지 숨어서 지켜 보다가 다른 사람이 모두 잠들었을 때 보아스의 천막으로 들어가서 어쩌고 저쩌고 해라. 이 부분에 대해서 특히 4절의 마지막 부분, “그의 발치를 들고 누워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은 그냥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발끝에 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 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이지요. 이정도면 솔직히 한국에서 유행하는 아침 드라마급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이 받을 충격과 당혹감을 더 크게 하기 위해서 장치를 사용합니다. 1절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원문에는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기 전체에서 딱 한 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지금 그녀가 꾸미고 있는 계획, 더구나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아름답게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나오미가 말하는 이런 일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어차피 그 집안의 고엘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고엘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영원히 사고 팔지 못하도록, 즉 땅을 생계의 수단이 아닌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 제도입니다. 또한 공동체적의 삶에서 이웃의 가난과 불행에 대해서 짐을 같이 져주기 위한 아름다운 제도였습니다. “고엘의 의무는 친한 친척이 가난 때문에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아야 했을 때, 그 땅을 대신 사주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의 의무는 보상이나 보복을 대신 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고엘의 의무를 확대 해석합니다. 룻기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 분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엘을 맡은 사람은 나오미의 집안처럼 남자가 다 죽어서 대가 끊길 위기에 있을 때, 그 집안에 아들을 낳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형사취수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어서 집안의 대를 이을 수가 없을 때, 죽은 사람의 형이나 남동생이 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해주는, 지극히 민망한 전통입니다. 하지만, 그 것은 철저하게 가족 간에만 해당되는 경우였습니다.

     

    설령 나오미가 꾸미고 있는 일이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합법적인 일이라면, 굳이 밤에 남의 눈을 피해서 창녀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대낮에 당당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요.

     

    우리가 더 고비를 맞게 되는 것은 룻의 태도 때문입니다.

    1,2장에서 우리가 만난 룻은 정말 현숙한 여인입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자 새출발하라는 시어머니의 간청을 눈물로 뿌리치고 기어코 과부 시어머니를 따라서 다른 나라까지 온 사람입니다. ‘죽기 전에는결코 시어머니를 떠날 수 없다고 눈물로 맹세하던 그녀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의 충격적인 제안을 다 듣고 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저자는 독자에게 룻이 나오미가 아닌 시어머니에게대답했다고 말합니다.

    룻은 우리의 기대를 순식간에 저버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기대대로라면, 그녀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펄펄 뛰었어야 합니다.

     

    첫째는 날 보고 어머니를 떠나서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따라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나 하나 행복하자고 어머니를 떠나란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죽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머니, 해도 너무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 했습니다. 편안함을 버리고 고행 떠나서 이 곳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은 나 보고 개같은 모압여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짓굳은 남자들은 추근댑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녀들이나 하는 그런 짓을 저에게 시키십니까? 어머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두 경우가 아니라면, 최소한 그녀는 한 번 고민해 볼께요리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I will” 끝입니다. 룻이 진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이 부분에서 룻기를 기록한 저자가 무척이나 서운합니다. 최소한 그는 우리에게 작은 복선이라도 하나 남겨 주었어야 합니다. 아니면 한 줄만 삽입해 주면 됩니다.

    그날 밤 꿈에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말씀하셨다.” 이러면 다 해결 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없습니다. 저자는 너무나 불친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룻기를 대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윤리적 판단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우리의 윤리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룻기 3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집중해야 할 그것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윤리적이고 상식적인 문제에 집착해서 보아야 할 큰 그림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략된 룻의 고민을 상상해야 합니다.

     

    그녀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하겠습니다.”라는 한 마디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을 그녀의 눈물의 밤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홀로 된 자신을 지키겠노라고 자신의 가족, 민족, 종교...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따라 온,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스러운 며느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아도, 미친 늙은이라고 심지어 3천년이 지난 21세기에 까지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아도, 쉴 곳 없는 며느리에게 이방 여인이라는 조롱과 폭력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그래서 진정으로 쉴 만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비난의 화살도 감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까지, 며느리 몰래 흘렸을 그녀의 눈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에서 나오미와 룻은 다짐했을 것입니다. 절대로 울지 말아야지, 잔인할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게 ……

     

    그렇게 그들이 선택한 것은 고귀한 희생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미래를 위해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룻기의 주제는 헤세드입니다.

    헤세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우리에게 한 번 고민해 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헤세드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 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임신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인류를 구원할 자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비록 정혼한 사람이 있지만,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아기를 임신했다면 간음한 여자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희생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복음 138절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헤세드는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헤세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이 귀한 복음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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