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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6. 귀 기울이기룻기 강해 2024. 2. 17. 09:35
20180701
룻기 4:1-8
한국 축구가 독일을 이겼습니다.
비록 두 팀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디펜딩 챔피언이면서 명실공히 세계 최강 팀 중의 하나인 독일을 한국이 이겼다는 사실은 더구나 두 골이 모두 경기 종료 직전에 터졌다는 것이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보는듯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2016년 말 이후로 계속되는 드라마를 써오는 것 같습니다. 사건들 마다 극적이고 감동적이며 열광하기에 충분합니다. 마치 그 동안 쌓여있던 체증을 한번에 밀어내려는 듯, 한민족의 핏줄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몰두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역시 최대의 이변이었던 사건은 개최국 한국이 4강에 진출한 사건이었습니다. 여러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에서 지진파가 감지될 만큼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한 경기 한 경기, 극적이지 않은 경기가 없었습니다. 거리응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고, 전국의 광장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함성을 질러 댔습니다. 심지어 국민 수필가로 인정되었던 피천득 선생님도 당시 아흔 셋이란 노구를 이끌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설 정도였습니다.
그 때 피천득 선생님이 시를 하나 쓰셨는데 제목이 ‘붉은 악마’였습니다.
“붉은 악마들의 / 끓는 피
슛! 슛! 슛 볼이 / 적의 문을 부수는 / 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 / 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 / 정말 미친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한민족에게 이런 광기에 가까운 열기가 있을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 광기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한국 축구가 4강에 올라간 기적보다도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이 바로 거리 응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저는 조금 서글펐습니다.
당시, 4강전에서 독일에 패하고, 3,4위 전에서 터키에게 패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저의 머리 속에 들었던 생각은, “그만하면 됐다. 이제 제자리들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였습니다.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천 년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렇게 자발적으로,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 백성들이 한 날 한 시에 거리에 쏟아져 나온 적이 과연 있었을까?
그래서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 민중들은 항상 억압 받고, 짓눌리다가, 참다 못해 일어서서 횃불을 들고 모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축구는 마법같은 힘으로 순전히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사람들을 광장으로 끌어 모았습니다. 너무하다 싶은 옷차림도, 평상시 같으면 멱살을 잡고 싸움을 벌였을만한 일도 허허 웃어 넘겼습니다. 아파트의 층간 소음이나 주차 문제 때문에 살인도 불사하는 도심의 아파트 단지에서도 그 때만큼은 아무리 발을 구르고 악을 써도, 시도 때도 없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다녀도, 모르는 사람이 내 차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어도 … 그 때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표현처럼 “모두가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온 나라가 미쳐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의 한 시골길에서 중학교 2학년 여학생 두 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몸이 으스러졌습니다. 그 소식은 월드컵이 모두 끝난 7월에 가서야 국민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역사는 참 묘하게 돌아갑니다.
한국과 독일 전이 있었던 지난 6월27일에도 대한민국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48살의 한 가장이 자살했습니다. “못 난 남편 만나 고생만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간다.”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저도 그 날 새벽 두 시에 텔레비전 앞에서 악을 쓰고 있었습니다. 자살한 남자는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9년째 어렵고 고통스러운 해고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2015년 말에 회사측의 복직 약속을 받아냈지만165명 중에서 48명만 복직이 되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죽음은 이번이 30번째 입니다.
좀 너무하는 것 같습니다.
온통 조현우와 손흥민에 집중하느라, 이름조차 ‘김모’씨로만 알려진 해고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날, 27일에 한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군인출신으로 국무총리 두 번, 국회의원 아홉 번 등등 … 대통령이란 직위만 빼놓고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부와 권력은 모두 누리다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은 김종필씨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군사반란의 주역이었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고, 독재자 박정희의 충성스런 개로 살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던 그에게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주어졌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들이 대접 받는 나라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작은 신음 소리에 온 공동체가 함께 반응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사람에게 주어지고, 그 ‘헤세드’를 누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헤세드’를 나누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보아스는 성 문 위에 앉아 있습니다.
보아스는 전 날 밤 룻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성 문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그 곳을 드나드는 마을 사람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 참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보아스가 말했던 나오미에게 “고엘” 1순위의 자격이 있는 친척이 지나갑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불러놓고, 마을의 장로 10 명을 초청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죽은 엘리멜렉이 생전에 팔았던 땅을 모압으로 이민 갔던 그의 아내 나오미가 돌아왔으니, 다시 사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다음 자격자인 자신이 사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친척은 자신이 기꺼이 “고엘”이 되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보충설명을 합니다.
만약 “고엘”이 되어서 그 밭을 사게 되면, 나오미에게는 죽은 아들의 아내 즉, 모압 출신 며느리가 있는데 그 집안까지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친척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6절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고엘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소. 잘못하다가는 내 재산만 축나겠소. 나는 그 책임을 질 수 없으니, 당신이 내가 져야 할 고엘의 책임을 지시오."
이 사람은 순간,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굴렸을 것입니다.
죽은 나오미의 남편을 대신해서 그가 팔았던 땅을 다시 사주는 것은 분명히 자신에게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에게는 아들 둘도 이미 죽어버려서 상속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부동산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느리 룻을 같이 떠 맡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만약 룻이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 아들은 엘리멜렉의 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사 준 땅은 고스란히 그 집안의 소유가 되는 것이지요.
이 친척의 행동 원칙의 기준이 무엇이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손익 여부' 이것이 곧 그의 행동 원칙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는 일은 그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떠한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회피해 버립니다. 선택 여부를 자신의 손익을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보아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이러한 조건들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고엘”이 갖고있는 하나님의 원리, 즉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원리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가 거절하면, 내가 고엘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교회에서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형제를 대했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봅니다. 사사기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신앙 상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무법천지는 힘들지요. 하지만, 이 말을 오늘에 적용시켜 보면 ‘자기 이익에 유리한대로 행동했다’가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이지 입술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과 입술은 그리스도의 길에 있으면서도 삶은 그리스도와 다른 길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말한다면 믿음 앞에서는 자신의 유익에 대해서 마음 두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신 정신이 자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손익 여부를 계산하면서 순종할 것과 거부할 것을 구분하셨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행동 기준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기에 행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행동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수님의 뜻이 일치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이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된 뜻과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큰 함성과 화려함에 묻혀 버린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구걸로 먹고 살아가던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마가는 그 사건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라는 도시를 지날 때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수많은 인파들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그 인파들 속에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바디매오의 목소리는 묻혀 버렸습니다. 그가 앞 못보는 맹인이었고, 구걸하는 사람이었다는 표현도 그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불쌍한 그의 외침을 많은 사람들은 눌러버리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길을 지나시다가, 맹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소리들에 귀를 기울입니까?
우리 주변에서 모든 사람이 누리는 기쁨의 잔치가 열리고 있다면, 우리 역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가 두개인 까닭은 크고 화려한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서 작은 소리들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결코 잘못된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난민 과부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고엘 되기를 거부하는 친족을 대신해서 스스로 고엘이 되어주는 보아스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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