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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강해 17. 주연과 조연
    룻기 강해 2024. 2. 17. 09:38

    20180708

    룻기 4:9-12

     

     

    4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성경 룻기에는 분량 만큼이나 등장인물도 아주 간소합니다.

    주요 주인공은 나오미, 보아스, 룻 세 사람 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나오미입니다. 책의 제목이 우리에게 룻기로 알려져 있지만,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말까지 사실은 나오미가 가장 정점에 서 있습니다. 룻은 시종일관 시어머니 나오미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야기 전반에서 그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딱 한 번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게 되자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이삭을 주우러 가겠노라고 결심하고 들로 나간 일입니다. 타작 마당에서 보아스를 만나는 극적인 사건은 모두 나오미 연출, 룻은 배우로 등장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한 룻이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안고 기뻐하는 이는 나오미입니다. 또한 이웃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보아스와 룻에게 축하를 보내지 않고 나오미에게 축복을 건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까지 합니다. 416~17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룻은 시어머니가 짜놓은 각본대로 보아스에게 접근해서 그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주고 끝입니다. 보아스는 어떻습니까? 가장 늦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난데 없이 나타난 과부 친척들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자신의 재산까지 들여서 그녀들을 먹여 살리고 모압 출신의 난민 과부와 결혼도 합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쩌면 가장 많이 희생한 사람이고, 수고한 사람인데 마지막의 찬사와 환호는 몽땅 나오미에게로 향합니다.

     

    이야기를 철저하게 문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주인공은 나오미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는 조연입니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모를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고나서 약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잊혀졌던 룻과 보아스의 이름이 역사 속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 “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 1장의 이 대목은 어느 족보의 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보아스와 룻이 등장하지요. 누구의 족보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조연으로 등장했다가 잊혀진 룻과 보아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족보에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연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주연이 되고 싶어합니다. 기왕이면 하정우나 송혜교가 되고 싶어하지 오달수나 라미란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드디어 보아스가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고엘1순위 자격이 되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성문 위에 올라가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그를 만나 협상에 성공하는 장면을 묵상 했습니다. 마을의 원로 10명을 증인으로 세운 자리에서 벌어진 협상에서 보아스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이 팔았던 땅을 다시 사 주는 고엘의 의무를 이야기 했고, 그 사람은 이방 여인 룻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 고엘의 자격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고엘이 되기로 자원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재산상의 손익문제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인공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 자칫하면 재산상의 손익관계 때문에 고엘의 자격을 포기한 그 사람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결정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었고, 그의 자유였습니다. 그는 고엘의 책임을 지겠다고 나설 수도, 포기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재산상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그의 판단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포기한 고엘의 지위를 보아스는 재산상의 손익에 관계 없이 룻과 나오미를 불쌍히 여겨서 자신이 떠 안았다는 행동입니다. 보아스의 행동은 하나님의 헤세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칭송 받아 마땅합니다. 더구나 고엘의 지위를 포기한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때문에 더 빛나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룻기 2장에서 그러니까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막 도착했을 때, 저자는 이런 문장을 삽입했습니다. 21절입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

     

    보아스는 재력이 있는 사람, 또는 유력한 사람, 히브리어로 깁보르 하일이라고 불리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에게 고엘의 위치를 넘겨 주었던 그 친척은 어떤 사람 이었을까요? 재미있게도 저자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짧은 룻기에서 41~12절에 등장하는 그 사람은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고엘이라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당연히 그의 이름과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정도는 소개되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야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가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 첫째 며느리의 이름도 오르바라고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도 조금 이상합니다.

    41절에서 성문 위에 올라가서 그가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보아스가 그를 발견하고 룻기는 클라이막스로 향하게 되는데, 보아스가 그를 이렇게 부릅니다.

     

    여보시오, 이리로 좀 올라와 앉으시오”(새번역)

    공동번역 성서는 보아스가 그에게 반말로 부릅니다. “여보게, 이리로 와서 앉게나”. 우리말 번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언어습관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은 조금 다릅니다. 모든 영어 성경들은 “My Friend!”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한 성경이 개역개정 성경입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보아스가 그를 뭐라고 부르지요? “아무개야!”

    그리고 그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그냥 아무개로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어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보아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그는 바로 자신이 고엘이 되겠노라고 나섰습니다. 물론 뒤에 룻까지 떠 맡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격을 포기했지만, 자신의 돈을 들여서 남의 땅을 다시 사주는 일에 주저없이 대답할 정도라면 그는 틀림없이 상당한 재력가였을 것입니다. , 그 사람도 보아스 처럼 깁보르 하일”, “유력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저자는 굳이 아무개라고 표현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행여라도 그가 받을 선의의 피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아무개의 행동은 전혀 정죄나 판단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에 집중하는 독자들은 자칫하면 주인공의 위대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되고, 그 결과 아무개씨는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저자를 만나게 되면 저의 분석과 해석이 맞는지 따져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연락이 닿지 않기 때문에 저의 해석이 맞을 겁니다.

     

    오늘 읽은 9절에서 12절에는 협상이 다 끝나고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4절 속에 유난히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증인이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보아스가 자신이 고엘의 자격이 되었다는 것을 마을의 장로들에게 학인시키면서 당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라는 확인을 두 차례나 하고, 장로들 또한 자신들이 이 일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여기에 모인 마을의 장로들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이 이야기에서 이름처럼 소중한 칭호를 얻습니다. “증인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보아스가 행하는 고엘의 일, 몰락한 한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일, “헤세드를 실천하는 일,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위대한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름이 기억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증인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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