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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강해 18, 세 여자 이야기
    룻기 강해 2024. 2. 17. 16:12

    20180715

    룻기 4:9-12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어보셨습니까?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경리의 토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만큼 기념비적인 유산입니다. 토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무려 700명이 넘습니다. 일반적으로 최서희나 길상이 정도만 주인공으로 기억하지만, 15권의 책 속에서 700 명의 인물들은 크고 작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토지처럼 긴 소설을 일컬어 대하소설이라고 부릅니다. 그 길이가 큰 강과 같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토지는 정말로 끊임 없이 굽이쳐 흐르는 큰 강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 중심에서 최참판댁이라는 한 가문의 이야기가 서 있지만, 그 집안이 역사와 함께 몰락해 가고 사라지려는 위기와 다시 그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 속에서 박경리 선생님은 단순히 한 집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토지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룻기를 묵상해 오면서 저의 머리 속에서는 내내 토지가 오버랩되었습니다.

    살아보겠다고 모압으로 이민을 간 가정과 쫄딱 망해버린 빈털털이가 되고, 남자들 마저 모조리 죽어버린 텅 빈 몸으로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가 몰락해 버린 집과 땅을 버리고 만주로 도망가는 어린 서희와 우여곡절 끝에 고행에 돌아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장년 서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토지에서 제가 주목하는 세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비운의 인물들입니다.

     

    첫째는 봉순이 입니다.

    그녀는 서희의 몸종이었습니다. 나이는 서희보다 두세 살 위이지만 몸종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녀는 최참판 댁에서 같이 몸종으로 일하는 길상이와 혼인하기로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서희 일행이 만주로 도망가는 와중에 봉순이는 조준구의 계략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합니다. 결국 봉순이는 기생이 되어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며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고, 길상이는 만주에서 서희 아가씨와 결혼을 합니다. 봉순이의 삶은 비참하게 끝납니다. 그녀는 아편쟁이가 되어 급기야 섬진강에 몸을 던져 비극적인 삶을 마치지요.

     

    또 한 사람은 월선이 입니다.

    그녀는 무당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천민이지요. 그런데 그녀의 첫사랑은 용이 였습니다. ‘토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비록 최참판댁 소작인이지만 똑똑하고 잘생겨서 최참판댁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 때문인지 용이는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데 강청댁입니다. 월선이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으나 소박을 맞고 주막을 운영하지요. 그녀는 늘 용이를 잊지 못합니다. 용이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 못해서 강청댁이 죽고, 재혼을 하는데 악처로 유명한 임이네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 홍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용이도 월선이도 서로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월선이는 웬만한 남정네 뺨치는 악처 임이네에게 갖은 구박과 시련을 당합니다. 결국, 임이네도 죽고 용이는 만주의 벌목장으로 돈벌러가고 월선이는 용이의 아들 홍이를 자기 아들처럼 돌보고 기릅니다. 그리고 용이가 월선이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비운의 여인은 옥이 엄마입니다.

    만주로 도망을 온 서희는 할머니가 몰래 남겨준 금괴를 밑천으로 쌀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법니다. 물론 길상이가 다 했지요. 세월이 흘러서 서희도 길상이도 어엿한 장년이 되어서 혼인할 때가 되었습니다. 서희는 비록 자신의 몸종이지만 항상 자신의 곁에서 듬직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을 지켜준 길상이에게 은근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길상이는 그저 서희는 자신의 상전이고 자신은 하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길상이에게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습니다. 애 딸린 과부였습니다. 삯바느질을 해서 겨우 어린 딸 하나를 건사하고 살아가지만 고운 마음씨 때문에 길상이의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그 소문을 전해들은 서희가 수소문 끝에 옥이 엄마를 찾아가고, 돈뭉치를 던져주면서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싸늘하게 경고하지요. 결국 서희는 길상이와 결혼합니다.

     

    어떻습니까? 봉순이, 월선이, 옥이 엄마 …. 대하소설 토지 속에서, 700 명이라는 엄청난 인물들 속에서 이 세 여인이 차지하는 지면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토지에서 이 작은 세 여인의 비극적인 눈물과 한숨은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이야기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 속에서도 오랫동안 잊혀진 세 여인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 (룻기 411~12.)

     

    라헬과 레아와 다말, 이 세 여인은 공통점이 있는데 셋 다 창세기에 등장하며 야곱의 족보 속에 나오고, 비운의 여인들입니다. 룻기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룻을 축복합니다.

     

    레아와 라헬은 자매였습니다. 동시에 그녀들은 한 남편을 둔 동서지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집 간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사촌 오빠가 되는 야곱이 찾아와서 함께 지냅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청했는데, 삼촌은 공짜로 딸을 줄 수는 없으니 자신의 양과 염소를 치면서 일을 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삼촌은 야곱을 속입니다. 결혼식 날 밤에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삼촌은 그것을 미끼로 라헬을 데려 갈려면 7년을 더 일하라고 하고, 야곱은 또 7년을 일해서 라헬을 얻습니다. 아내가 둘이면 얼마나 심란하겠습니까? 라헬은 얼굴은 예쁜데 아이를 못 낳습니다. 언니 레아는 미모는 조금 떨어지지만 아기를 잘 낳습니다. 자매이면서 동시에 한 남자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은 불꽃 튀기는 경쟁을 합니다. 언니는 아들을 넷이나 낳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서럽게 기다립니다. 라헬은 늘 자신의 곁에 남편이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신세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언제라도 남편의 사랑이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겠지요.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자신의 몸종을 씨받이로 남편에게 주어서 대신 아들을 낳습니다. 그러자 늙어서 출산이 중단된 언니 레아도 자신의 몸 종을 씨받이로 주어서 아들을 더 낳습니다. 오늘날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어이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코미디 같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레아와 라헬에게는 애간장이 녹아 내리는 일입니다. 얼마나 기구한 여인들입니까? 그뿐입니까.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들 등살에 엉겁결에 씨받이로 들어가서 아들을 대신 낳아주는 몸 종 빌하와 실바의 처지는 또 어떻습니까?

     

    그래서인지 창세기의 저자는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레아와 남편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라헬이 하나님께 호소했고, 하나님이 그녀들의 호소를 각각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넷이나 낳았고, 나중에는 라헬도 아들을 둘 낳았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아들 넷을 낳고 난 후에 기록에서 사라져 버렸고, 라헬도 길 가에서 막내 아들을 낳고 죽어 버립니다. 참 비극적인 여인들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에게서 난 넷째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그토록 상종하기를 꺼려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다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 아들의 며느리가 바로 다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의 인생에 비극이 시작됩니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어 버립니다.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통에 따라 둘째 아들이 형수와 잠자리를 해서 대를 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이 손익계산을 해보니, 자신이 형수에게 아들을 낳게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이상한 짓을 해버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괘씸하게 여겨서 그를 죽여 버립니다. 이제 막네 아들 셀라가 남았는데, 유다의 입장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겠지요. 며느리 하나가 들어와서 그만 아들이 둘이 죽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유다는 일단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 보냅니다. 막내가 아직 어리니 그가 장성하면 너를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습니다.

     

    친정으로 쫓겨난 다말은 자신의 처지가 무척 서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세째 아들이 장성하면 다시 부르겠다는 시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는 그녀를 부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이미 시동생은 장성한 청년이 되었고 말입니다. 한편, 아내가 죽고 나서 적적해진 유다는 종종 몸을 파는 여인들에게서 외로움을 달랬나 봅니다. 다말은 그런 눈치를 채고 어느날 창녀로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했습니다. 그녀의 계획대로 시아버지는 변장한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 그 댓가로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을 몇가지 줍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며느리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서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가문의 수치라고 여겨 화가 난 유다는 당장 다말을 끌고 와서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합니다. 다말은 끌려 가면서 시아버지 유다에게 몇 가지 물건을 보여 줍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하면서단번에 그 물건들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린 유다는 다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요.

     

    네가 나보다 옳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생긴 실수이구나.” 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때가 차서 다말이 아기를 낳았는데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의 장남이 베레스 입니다.

     

    레아와 라헬보다 더 엽기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다말입니다.

    족보가 참으로 민망하지요. 베레스는 분명히 유다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베레스는 유다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수치스러운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룻기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될 룻에게 라헬과 레아처럼, 또는 다말처럼 되기를 워한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연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련의 여인들인 라헬, 레아 그리고 다말은 우리 인간들의 삶 속에서 무수하게 일어나는 수치와 슬픔과 한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슬픔이 그냥 슬픔으로만 끝나버렸다면 그녀들은 영원히 한을 품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막힌 역설을 통해서 역사를 기록해 나가셨습니다.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베들레헴 장로들에게 라헬과 레아는 단순한 비련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당사자들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향한 눈물겨운 그녀들의 호소때문에 야곱의 열 두 아들이 태어났고 그들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다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문의 손은 당연히 장남을 통해서 이어지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장남은 르우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장남이 아닌 네째 아들 유다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바로 부적절하고 수치스러운 관계를 통해서 아들을 낳은 다말을 통해서 입니다.

     

    , 이방 여인 룻의 고엘이 되기를 자처한 보아스에게 베들레헴 장로들은 룻이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난민 과부가 아닌, 무너져 가는 한 집안을 세우는 위대한 여인이 될 것이라는 축복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집안을 세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사명을 말합니다.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 언약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그 뿐만 아니라, 나 주가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는 것을 이제 나 주가 너에게 선언한다.” (삼하 7:11)

     

    다윗의 집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왕조를 이루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한 집안에서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의 언약으로 확대 됩니다. 바로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 다윗이 보아스와 룻의 증손자입니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룻기의 저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참 깊고 넓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집이라는 틀을 통해서 인류 전체로 확대되는 구원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라헬과 레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우시고, 다말을 통해서 유다의 집을 세우시고, 룻을 통해서 결국은 다윗의 집을 세워 가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서사시는 이렇게 커다란 강물이 되어서 흘러 왔습니다.

    끊어져 버릴 것 같은 몰락해 가는 한 집이 세워져 가는 것은 단순히 가족의 역사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험한 산을 만나고 사람들이 강물의 흐름을 막아보려고 댐을 쌓기도 하지만, 강물은 흘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마을을 만나서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살리게 해 줍니다.

     

    이스라엘, 즉 야곱의 집과 유다의 집을 거쳐 다윗의 집으로 흘러 온 하나님의 언약은 마침내 집에서 왕조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약 오백년을 흘러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습니다. 다윗 왕조가 멸망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잊혀지는 것 같았습니다. 4백년 동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암흑의 역사를 뚫고 한 여인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웁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입니다.

     

    혹시 누추하고 지난한 나그네의 삶이 고달프십니까?

     

    이 넓고 넓은 세상 속에서 이렇게 무명한 자로 살아가다가 잊혀질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집을 세워가는 작은 일 속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라헬과 레아와 다말을 통해서 그리고 룻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시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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