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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19. 기적과 섭리룻기 강해 2024. 2. 17. 16:19
20180722
룻기 4장 13~17절
어린시절, 동네 골목길의 전신주들에서 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 전단지를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전단지에는 대부분 이런 글귀가 들어 갑니다. “와 보라! 기적을 체험하는 밤. 능력의 종, 불의 종!” 이 보다 더 유치한 전단지도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기적을 체험하라!”
그런 부흥회는 대부분 3일을 합니다. 새벽, 낮, 밤 하루 세 번씩 하는데 가장 화끈한 시간은 뭐니뭐니 해도 밤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듣기에 참 거북한 쇳소리를 냅니다. 그런 목소리를 듣고 성도들은 ‘참 은혜스럽다’라고 합니다. 제가 부흥회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된 첫 번째 요인입니다. 그 분들은 설교할 때, 최대한 허스키한 소리를 내려고 심지어 쇠가 긁어지는 소리까지 내다가, 설교가 끝나고 통성기도 할 때가 되면 목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로 바뀝니다. 그리고 부흥사들의 설교는 반말이 절반입니다. 아무리 연세드신 꼬부랑 할머니들이 앉아 계셔도 그들은 여지없이 마이크를 송대관이나 태진아처럼 들고, 짝다리를 집고 서서 반말을 해 댑니다. 그것이 제가 부흥회를 싫어하게 된 두 번째 요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마지막 날 저녁 시간에 부흥사들은 필살기를 사용합니다. 그 시간이 성도가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첫째 날부터 새벽 낮 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마지막 날에 펼쳐지는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집중하며 매달립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은혜’는 다름 아닌 기적입니다.
저도 역시 한 참 민감하던 사춘기 때, 부흥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정말 눈물로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민감한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것을 저에게서 가져가 달라고 죽을 것처럼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 아무런 기적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기적이란 것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기적으로 증명됩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가짜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적은 필수적인 요소입니까?
만약, 기적이란 것이 인간의 경험이나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런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증명된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룻기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책이 됩니다.
룻기에는 다른 성경에서 흔하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룻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대체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실까?’ 라는 질문입니다. 룻기를 만들어 가는 사건들은 대부분 우연으로 이루어 지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우러 가고, 이삭줍기를 하던 첫날 보아스는 우연히 자신의 밭에 들렀다가, 우연히 룻을 만납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알고보니 친척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룻은 시어머니의 계획에 성실하게 따릅니다.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쉬지도 못하고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의 인간에게 직접 개입해서 일하셨다는 기록은 단 두 번 나옵니다.
첫째는 모압으로 이민을 간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털털이가 되었을 때,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의 일입니다. 1장 6절.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이 곡식을 많이 주셨다는 저자의 해설입니다.
원문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방문하셔서 먹을 것을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4장 13절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은 흉년으로 고생하던 베들레헴에 곡식을 주셨고, 보아스와 결혼한 룻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의 흉년 후에 풍년이 든 것과, 결혼한 신부가 임신한 것을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이 두 사건은 결코 기적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룻기가 좋습니다.
어쩌면 룻기의 이야기는 기적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믿음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은 존재할까요, 존재하지 않을까요?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태국의 동굴에 갇힌 열 세명의 유소년 축구팀이 실종 17일만에 전원이 무사하게 구조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국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세계 각국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여든 구조대원들, 또 국적은 다르지만 한 마음으로 그들의 생환을 바라는 마음들이 만들어 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나 2014년 세월호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 한민족에게는 기쁨과 착잡함이 동시에 들게 하는 일이었지요. 그것은 기적입니까, 아닙니까?
제가 볼 때 마다 감동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의 제목은 ‘신당역의 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밀고 있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03년 10월14일 밤 10시 무렵에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있었던 장면입니다. 한 승객이 반대편으로 가는 전철을 타려고 선로를 가로지르다가 그만 들어오는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끼어 버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이 기관사가 급정거를 한 탓에 남자는 열차에 치이지 않고 살아 있었으나 열차와 승강장에 끼어 있어서 위험한 상황이었죠. 다급해진 사람들이 119로 전화를 하는데, 한 사람이 열차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더니 급기야 너도 나도 열차에 붙어서 밀기 시작했고, 전동차가 움직이면서 승객을 구해 냈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까, 사람들의 노력입니까?
두 사건 모두, 기적입니다. 충분히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누구도 사람이 밀어서 열차가 움직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맨 처음에 열차에 달려들어 밀기를 시도했던 사람을 보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해 보기라도 하자”라는 마음으로 모여 든, 깡마른 아가씨, 머리 벗겨진 할아버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아저씨, 건들건들해 보이는 고등학생…..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생명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개미처럼 달라 붙었을 때,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 앞에서 일어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기적은 극히 드물지만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확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가지가 어우러져서 ‘기적’이란 것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적을 바랍니다. 왜 그럴까요? 놀라운 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그것보다는 당장에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그때는 아무 일도 하고 계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해달라고, 놀라운 일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빈털털이 과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 온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한탄할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었습니다. 룻이 수치와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밭에 나가서 일꾼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즉 무법천지였던 사사시대, 죄가 가득 찬 때에 신실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던 보아스의 삶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기적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하나님에게는 전혀 기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섭리 providence’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사실 섭리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그 뜻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하고 보전시키는 전 과정이 바로 섭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귀찮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에 관여하시고 환경을 주관하십니다.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개개인이지만 지휘자가 그 사람들을 지휘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삶을 통하여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기적을 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적을 보여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 속에서 기적적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룻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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