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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강해 20. 낯설게 하기룻기 강해 2024. 2. 17. 16:29
20180729
룻기 4장 13~17절
지난 한 주 동안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많이 우울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는 곧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지금 오십 몇 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오십 몇 년을 죽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단 한 순간도 내 곁에서 떨어질 수 없이 붙어 다니지만,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 늘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싶은 것, 바로 죽음입니다.
2007년 4월, 늦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고, 첫 번째 주일예배가 끝나고 바로 가까운 곳의 산 속에 있는 수양관으로 올라 갔습니다. 안수식까지의 몇 주 동안 많이 긴장했고 피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업무가 모두 끝나고 퇴근해서 옷만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올라갔습니다. 산에 들어가면서 일부러 핸드폰의 전원도 꺼 놓았습니다. 그리고 계곡에 앉아서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푹 자고, 아침 산책을 하면서 성경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10시쯤 되어서 나도 모르게 핸드폰의 전원을 켰습니다. 원래 계획은 오후까지 꽉 채우고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핸드폰에 손이 갔던 것입니다. 전원을 켜자 전날 밤부터 아침까지 걸려온, 몇 건의 부재 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불과 몇 건 이었지만 전화를 걸었던 분들이 평소에 저와 자주 통화를 하는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맨 나중에 수신된 번호로 전화를 했습니다.
60대의 여자 성도님인데, 저의 전화를 받더니 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죽었어요.”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자 방문을 열고 들어 갔는데 아들은 잠자리에 누운 상태로 숨져 있었고, 이부자리 옆에는 약병이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전화를 다시 확인해 보니, 전날 밤 숨진 성도는 저에게 몇차례 전화를 했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급한 상황이 생겨서 일찍 내려가야겠다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나서 저는 고인이 저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안되자 아내에게 전화를 했고, 다행이 아내가 상당히 긴 시간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 전에 그의 전화를 내가 받았다면 같은 남자인 저에게는 더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더 안까웠던 것은 그에게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내와 동갑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간질을 앓아오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낳았으나 그 질병 때문에 아내는 집을 나가고, 그는 어린 아들과 함께 부모님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종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어쩔 때는 제가 병원으로 심방을 갔을 때도 간질 발작을 일으켜서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고통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신앙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를 그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 날, 산에서 내려와서 그의 빈소를 찾았는데 저는 또 한번 절망해야 했습니다. 그의 빈소는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자살 했다는 것 때문에 부모님은 아들의 죽음을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못했고, 더구나 사위가 장로교단의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에 대한 보수적인 교단의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조문객이 한 명도 없는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까지 외롭게 가는 그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그의 고독이 느껴져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어릴 때부터 죽음이라는 문제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저는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말러와 바그너의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특별한 영향을 받은 음악이 있습니다. 바그너, 말러가 아닙니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라는 현악 4중주곡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자주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갖게 되는 이상한 생각이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즉 세상에서 그 분을 가장 많이 닮은 인간, 그러나 그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 죄의 행위를 말리지 않으시고,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죽음이라는 걸 반드시 맛보게 하시고…..
저는 종종 이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매일은 아니지만 제가 되도록이면 주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에 제가 묵상한 말씀과 묵상의 내용을 성도들에게 보내 드립니다. 그 나눔의 마음은 교우들을 향한 저의 진심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고단한 교우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평화와 위로를 주시며, 우리에게 얽힌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에게도 교우들에게도 하나님은 오늘 하루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 위로와 치유의 하나님으로 고백되기를 바라면서 묵상을 나눕니다.
그러나 저는 잘 압니다.
때때로 저의 묵상 나눔은 교우들에게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성경묵상의 그 짤막한 시간과 여유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우리의 외적 상황과 내적 갈등들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살아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룻기를 강해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룻기 4장 18절부터 22절에는 족보가 나옵니다.
다음은 베레스의 계보이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이 부분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사족’이라고 분류해도 되는 구절입니다.
사실상 룻기는 17절에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아마도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삽입된 대목으로 추정됩니다.
룻기를 정리하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룻기의 주제가 뭐라고 했나요? “헤세드”라고 했지요? ‘헤세드’는 물론 ‘자비, 긍휼, 친절’등의 뜻이 있지만, 그 만큼 중요한 것이 ‘신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은 백성이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보이는 신실함,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비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는 친절.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헤세드”라는 커다란 구원사역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룻기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감동 중의 하나는 바로 ‘낯설게 하기’입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원래 문학용어 입니다.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 언어의 세계는 이런 자동화에 의해서 신선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자동화 되어버린 일상적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려는 시도입니다.
“늦은 아침에 이불을 걷으며 일어났다 밥 한 공기를 먹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질을 깨끗이 했다”
이 문장들을 내용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이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아침 햇살이 머리맡에까지 찾아와서 이불을 빼앗아 가 버렸다. 위장에 공깃밥 한 그릇을 배달시켜 주었다. 치약을 물고 칫솔이 입안으로 쳐들어오니 이빨들이 지레 거품을 물었다”
룻기에는 이런 고도의 ‘낯설게 하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3장에서 룻이 목욕을 하고 몸에 행수를 뿌리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 보아스가 누워 잠든 천막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옆에 누웠을 때, 자다가 룻을 발견한 보아스가 올라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Who are you?” 그런데 다음날 새벽, 보아스와 밤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 며느리를 시어머니 나오미가 맞으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3장 16절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돌아오니, 시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어찌 되었느냐?”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How did it go?’ 즉, 궁금해 하는 시어머니의 다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계신 성경책의 3장 16절에는 각주가 달려있습니다. 그 각주 번호를 찾아서 성경책 아래 쪽에 있는 해설 부분을 따라가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는, 너는 누구냐?”, 이 말은 ‘애야, 어찌 되었느냐’라고 묻는 나오미의 질문이 ‘너는 누구냐’일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나오미가 집에 돌아 온 룻에게 한 첫 마디는 ‘너는 누구냐’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가 맞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하셨던 학자들은 많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문장은 “애야, 어떻게 되었느냐?”로 의역을 하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전개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영어성경 킹제임스 버전과 ASV성경은 원문대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가슴을 졸이며 시어머니가 세워놓은 계획에 따르기로 결단하고 밤에 다른 남자의 침소에 들어갔다가 돌아 온 자신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시어머니가 룻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가슴 졸이며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며느리를 기다리던 시어머니는 아침에 돌아온 며느리를 보자마자 가슴에 꼭 안아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다독이며 눈물을 훔치며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떠 올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런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립니다.
바로 이것이 룻기를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할 새로운 관점입니다.
저자는 밤에 보아스가 룻에게 던졌던 질문과, 다음 날 아침 나오미가 룻에게 던졌던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하룻밤 사이에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룻은 이제 더 이상 보아스의 인생에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그 날 이후부터 룻은 나오미의 인생에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가 룻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던지는 질문 속에는 “이제부터는 네가 나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함의 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제 너의 길을 가거라. 이제는 이 곳에 낯선 사람이 되고, 지금까지 낯 선 세상에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거라.” 나오미는 지금 룻에게 새로운 시작과 변화에 대해서 과감하게 맞서라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지금 그리고 이곳’이라는 가치로부터의 거룩한 결별이 있습니다. 익숙함에 길들여지려는 습성에서 벗어나 낯 선 것에 대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기에서는 하나님도 낯설게 다가 옵니다.
자신의 언약 백성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시는 분이라면, 고향에 흉년이 들어서 모압으로 이민을 가는 일이 없도록 알아서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셨어야만 했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남의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 땅에서 일이 기적처럼 잘 풀려서 잘먹고 잘 살았어야 합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예전의 모습, 즉 홍해를 갈라주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게 하시고, 바위에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위엄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우연의 뒤에서 일하시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신실함 뒤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낯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방식 자체가 우리의 익숙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방식입니다. 달팽이는 늘 껍질을 등에 지고 다닙니다. 느리게 움직이면서 머리에 달린 더듬이 두 개로 세상과 만납니다. 그러나 낯선 것을 만나면 재빨리 껍질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익숙한 분으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껍질을 과감하게 벗어버리지 못하고, 나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모습에만 안심하고 안주하려 든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가치는 우리에게 영원히 낯선 것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낯설게 살아가기’는 이 세상을 미워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기 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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